굴곡지수에 의한 漢四郡 위치비정은 잘못이다.

 

필자는 김종서씨의 古朝鮮과 漢四郡 비정에 관한 論文 要旨를 우연히 인터넷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그 要旨를 보니 김종서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서 문헌 고증과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통해 古朝鮮과 漢四郡의 위치를 살펴보니 중국 河北省 동쪽에서 遼河 서쪽에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분은 古朝鮮과 漢四郡의 위치를 찾는 방법으로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사용한 것인데, 그 방법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東北 郡까지 거리와 현재의 지도에 나오는 거리를 비교하여 굴곡지수를 산출하여 그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김종서씨가 계산의 근거자료로 사용한 거리는 後漢書 郡國志에 적혀 있는 洛陽에서 동북쪽에 있는 漢郡縣까지 거리와 漢書 武帝紀 注에 茂陵書에 적혀 있다는 長安에서 臨屯郡까지 거리 6,138리, 辰番郡까지 거리 7,640리를 근거로 하여 계산했다고 한다.

김종서씨는 後漢書에 등장하는 洛陽 및 長安에서 東北 郡까지 거리와 현재 지도에 나오는 거리를 비교해 보니 後漢書와 武凌書에 적혀 있는 거리가 현재 지도상에 나오는 거리의 75% 미만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굴곡지수를 後漢書 등에 나오는 거리를 곱하여 나오는 거리를 현재 지도상의 거리로 산출하여 위치를 살펴보니, 漢四郡의 위치가 종래 추정해 온 위치와 다르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平壤 방면으로 추정되 온 樂浪郡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遼寧省 西部 錦州를 넘어설 수 없고. 또 鴨綠江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玄菟郡은 현재 北京 동북쪽 지역인 河北省 동쪽과 遼寧省 서부로 나왔으며, 黃海道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辰番郡은 遼寧省 서부 大凌河 유역으로 나왔다고 하였다.

김종서씨가 漢代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하여 계산한 결과 나온 辰番郡의 위치는 1990년대 초반 遼寧省 錦州에서 臨屯太守章이라는 직인이 찍힌 封泥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김종서씨가 비정한 漢四郡 위치는 아래 그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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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종서씨가 굴곡지수라는 것을 도입해 漢郡縣의 위치를 비정한 것은 심히 문제가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後漢書 郡國志에 등장하는 洛陽에서 東北郡까지 거리는 中國 正史에 적혀 있는 것이므로 신빙성이 있으나, 武陵書에 적혀 있는 辰番郡, 臨屯郡까지 거리는 심히 문제가 있다.

漢書·武帝紀에 주석으로 나오는 臨屯郡, 眞番郡까지 거리는 臣璨이 인용했던 武陵書 기록을 顔師古가 다시 인용한 것이다.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무릉서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 장안으로부터 6,138리 떨어져 있고 속현은 15현이요,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으로, 장안으로부터 7,640리 떨어져 있고 속현은 15현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史記·司馬相如傳에 의하면 司馬上如가 죽은 뒤 5년 후인 元鼎 4년(B.C 113년)에 后土에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는데, 사마상여가 죽은 해는 元狩 5년(B.C 117)이 되는데, 그 때는 漢四郡이 생기기 전이다. 따라서 武陵書에 적혀 있다는 거리를 근거로 하여 辰番郡, 臨屯郡의 위치를 찾는 것은 심히 문제가 있다.

漢書 司馬相如傳에는 司馬相如가 武陵書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相如既病免 家居茂陵 天子曰 "司馬相如病甚 可往從悉取其書 若後之 矣" 使所忠往 而相如已死 家無遺書 問其妻 對曰 "長卿未嘗有書也 時時著書 人又取去 長卿未死時 為一卷書 曰有使來求書 奏之 其遺札書言 封禪事 所忠奏焉 天子異之. 사마상여가 병이 나 사직 후 武陵에 있는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천자가 말하기를, "상여의 병이 심하다고 하니 그 집에 가서 있는 책을 모두 가져오라! 혹시 늦을지 모른다" 하였다. 소충을 보냈는데 상여는 이미 죽은 뒤였고, 집에는 남아 있는 책이 없었다. 그 아내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편은 지금까지 책이라고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책이라도 지으면 사람들이 그것마저 가져갔습니다. 남편이 살아계실 때 책 한 권을 쓴 것이 있는데 使者가 책을 구하러 오면 올리라 했습니다.". 그 책 유찰에는 封禪事에 관한 것이었다. 소충이 천자에게 올리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武凌書에 적혀 있는 辰番郡, 臨屯郡까지 거리는 무시해야 한다. 따라서 洛陽에서 東北郡까지 거리는 後漢書에 적혀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漢四郡은 樂浪郡, 辰番郡, 臨屯郡, 玄菟郡인데, 위 比定 연구에 의한 漢四郡圖에는 같은 시대에 존재하지 않은 군현이 함께 그려져 있다.

김종서씨가 後漢書에 적혀 있는 洛陽에서 東北郡까지 거리를 이용하여 漢四郡의 위치를 찾아냄에 있어 도로 굴곡지수를 이용하여 계산한 것은 심히 문제가 있다. 따라서 後漢書 등 중국 正史에 적혀 있는 지리지 문구에 나오는 東北郡의 위치를 살펴본다.

먼저 玄菟郡의 위치를 찾아본다.

 

[玄菟郡 武帝置 雒陽東北四千里 六城 .  高句驪 遼山遼水出[一], 西蓋馬, 上殷台, 高顯故屬遼東, 候城故屬遼東, 遼陽故屬遼東]

 

後漢 때 玄菟郡의 屬縣 高顯, 候城, 遼陽은 모두 전에 遼東郡의 屬縣이었다.

遼東郡은 秦開의 朝鮮 공격 후 난하 서쪽에 설치된 이래 B.C 75년까지 난하 서쪽에 있었다. 그후 b.c 75년에 遼東郡은 大凌河下流에서 單單大嶺 사이로 東進하였다. 그리고 玄菟郡 高句麗縣은 처음 지금의 沈陽 방면에 설치되었다가 뒤에 遼陽 서쪽 방면으로 옮겼다가 公孫氏 때 다시 沈陽 방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辰番郡, 臨屯郡, 初期의 樂浪郡은 멸망한 衛滿朝鮮 지역 즉 난하에서 遼河 사이에 있었다. 衛滿朝鮮의 영역은 처음 난하에서 遼東半島를 지나 西北韓 일부에까지 미쳤으나 후에 遼河 이동은 高九黎(일명 北夫餘. 고주몽고구려가 아니다.)에게 빼앗기고 멸망할 무렵 衛滿朝鮮의 영역은 난하에서 遼河 사이였다.

漢書, 後漢書, 三國志 등에 적혀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漢 시대 東北 郡縣의 변화를 살펴본다.

B.C 108년에 前漢은 난하에서 遼河 사이에 있는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난하 방면에는 樂浪郡 수개 縣을, 난하에서 遼河 사이에는 辰番郡과 臨屯郡의 현 각 15縣을 설치하였다.

다음해 B.C 107년에 遼河 동쪽 지역을 더 점령하여 遼河 동쪽에 樂浪郡을 추가로 설치하고 이를 방어할 軍事機構인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난하 방면에 있던 樂浪郡은 遼河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B.C 87년에 貊夷(東明)의 공격으로 辰番郡과 臨屯郡이 궤멸되었다.

B.C 82년에 행정적으로 이미 궤멸되어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辰番郡과 臨屯郡을 폐지하고 그 영역을 행정적으로 樂浪郡과 玄菟郡에 합쳤다. 그러나 이는 행정적인 조치일 뿐 실제 樂浪郡과 玄菟郡의 縣이 전의 辰番郡과 臨屯郡 지역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B.C 76년에 後漢은 토착거수들을 邑君, 邑長으로 임명하여 邑 단위로 자치를 허용해 주는 간접통치기구인 樂浪郡으로는 외부에서 貊夷의 공격이 있을 때 土着渠帥들이 시류에 따라 그 쪽으로 붙어 버리면 郡縣의 유지가 어렵다고 보고 土着渠帥들의 자치를 폐지하고 행정과 군사를 太守가 함께 관장하는 전통 중국군현으로 바꾸기 위한 조치로 부랑자, 죄수, 죄를 지은 관리 등 漢族들을 전국의 郡國에서 보아 遼東, 遼西 지역에 대량으로 사치시키고 遼東城과 玄菟城을 쌓은 후 난하 서쪽에 있는 遼西郡과 右北平郡의 東邊을 大凌河下流 방면까지 확장하고, 또 遼東郡을 大凌河下流에서 單單大嶺 사이로 東進시켰다. 이때 遼河 동쪽에는 遼東郡의 東進으로 영역이 많이 줄어들자 樂浪郡은 종래 屬縣이 설치되어 있지 않던 單單大嶺 동쪽에 樂浪郡 東部都尉를 두었고, 太子河 이남에 樂浪郡 南部都尉를 두었다. 그리고 樂浪太守 직할현은 太子河 방면에 흩어져 있었다.

A.D 30년 樂浪郡 東部都尉를 폐지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强盛으로 A.D 14년 이전에 이미 樂浪郡의 屬縣이 高句麗에 점령되어 소멸된 것을 현실화한 것이다.

A.D 44년 西北韓에 樂浪郡의 屬縣이 설치되었는데, 遼東에 있던 樂浪太守 직할현이 西北韓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樂浪郡의 郡治가 大同江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A.D 47년 西北韓의 樂浪郡의 활동이 사라진다. 이때부터 204년까지 西北韓에는 漢郡縣이 없었다.

A.D 49년경에 西北韓, 遼西, 遼東의 漢郡縣이 모두 활동을 중지하고 소멸되었다. 이 해 중국북부가 高句麗, 鮮卑에 점령되었다.

A.D 58년에 後漢은 鮮卑 大人들을 대부분 後漢에 귀부시키고 난하 以西, 長城 안쪽에 있는 郡縣을 수복하였다.

A.D 104년 後漢은 난하에서 遼河 사이 지역을 다시 수복하여 昌黎에 遼東郡 西部都尉를 설치하였다.

A.D 105-106년경에 遼河 동쪽 지방을 수복하여 樂浪郡, 玄菟郡, 遼東郡을 재건하였다. 이 해부터 고구려의 치열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遼河 이동은 때때로 高句麗에 점령되기도 하였고 고구려로부터 수복하여 郡縣을 재건하기도 하다가 A.D 400년경에 遼東의 중국왕조 군현은 완전히 사라졌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漢四郡은 樂浪郡, 辰番郡, 臨屯郡, 玄菟郡이고, 遼東郡, 遼西郡, 右北平郡은 난하 서쪽에 있던 전통 중국군현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이지 원래의 漢四郡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