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那와 日本府
日本書紀에는 任那와 日本府라는 말이 나온다.
日本書紀에 보이는 任那에 관한 기록은 崇神天皇紀 2회, 垂仁天皇紀2회, 應神天皇紀 2회, 雄略天皇紀 6회, 顕宗天皇紀 4회, 継体天皇紀 16회, 宣化天皇紀 3회, 欽明天皇紀 133회, 敏達天皇紀 9회, 崇峻天皇紀 4회, 推古天皇紀 29회, 舒明天皇紀 1회, 皇極天皇紀 1회, 孝徳天皇紀 7회 모두 219회가 보인다.
日本書紀 崇神天皇紀에 나오는 任那는 對馬島이다.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은 바다로 막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任那國 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日本書紀 崇神天皇紀 65年條
「군(郡:황해도 방면 대방군 지칭)으로부터 倭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돌아서 물 길로 가는데, 한국을 지나서 조금 남으로 가다가 조금 동으로 가서 왜국의 북안에 위치한 구야한국에 도착하게 되니 7천여리이다. 거기서 비로소 하나의 바다 천여리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한해라 하는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 건너면 일대국에 이른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渡一海千餘里至對馬國..中略..又南渡一海千餘里 名曰澣海至一大國..中略..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三國志 魏志 倭人傳
「전략..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이 400리쯤 된다.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하였다. 다시 바다를 건너 일천여리를 가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始渡一海千餘里 至對馬國 方可四百餘里 又渡一海千餘里至一岐國 方可三百里 本斯爾岐國也 子多諸島皆貢焉 又渡一海千餘里 至末盧國 本相婁人所聚也..」桓檀古記 大震國本紀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의하면 末盧國에서 一岐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一岐國에서 對馬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對馬國에서 狗邪韓國(김해 방면)까지 거리가 천여리이다. 따라서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의하면 筑紫國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곳은 對馬島이다.
桓檀古記에 적혀 있는 任那의 위치도 對馬島이다.
「任那는 원래 對馬島의 西北 境界였다. 北은 바다로 막히고 治所가 있었는데 國尾城이라 한다. 東西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뒤에 對馬의 두 섬은 마침내 任那가 통제하게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후략」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일본 사학자들도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 10월조에 나오는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駄唎鳴 梅豆羅古枳駄樓" 문구에 의하면 任那는 對馬島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계체천황(繼體天皇) 24년 10월조 문구를 살펴본다.
「冬十月 調吉士至自任那 奏言 毛野臣爲人傲佷 不閑治體 竟無和解 擾亂加羅 倜儻任意 而思不防患 故遣目頰子 徴召[目頰子 未詳也] 是歳 毛野臣 被召到于對馬 逢疾而死 送葬尋河 而入近江 其妻歌曰 比羅哿駄喩 輔曳輔枳能朋樓 阿苻美能野 愷那能倭倶吾伊 輔曳府枳能朋樓 目頰子 初到任那時 在彼郷家等 贈歌曰 柯羅屨儞嗚 以柯儞輔居等所 梅豆羅古枳駄樓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駄唎嗚 梅豆羅古枳駄樓 겨울 10월 調吉士가 임나로부터 와서 주하여, "毛野臣이 그 사람됨이 교만하고 사나와 정사에 힘쓰지 아니한다. 끝내는 화해 붙이지 못하고 加羅를 요란케 하였습니다. 자기 멋대로이고 방비에 힘쓰지 아니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고로 目頰子를 불러들였다.[目頰子는 누군지 미상이다.]. 이해에 毛野臣은 소환되어 대마도에 이르러 병들어 죽었다. 장사지낼 때에는 (그 관이) 강을 따라 近江에 들어왔다. 그 처는 노래를 하였다. 枚方 땅을 지나 피리를 불며 淀川을 거슬러 온다. 근강의 모야의 젊은이가 피리를 불며 淀川을 거슬러 올라온다. 目頰子가 처음 임나에 이르렀을 때에 거기에 있는 고향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보냈다. 柯羅에 어떻게 말하려고 目頰子가 오는가. 저쪽 壹岐의 나루를 거처 目頰子가 온다.」
위에 나오는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駄唎鳴 梅豆羅古枳駄樓" 문구에 대하여 일본의 어느 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駄唎鳴 梅豆羅古枳駄樓は むかさくる 壱岐のわたりを めづらこきたる(岩波文庫 日本書紀)で "向うに離れた 壱岐の海峡を メズラコが来たという意味になる。この歌の前には 目頰子 初到任那時とあり 目頰子は壱岐の海峡を通って任那に来たということがわかる もし任那が朝鮮半島の南端にあったのなら 壱岐のわたりではなく 対馬のわたり となるはずである.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駄唎鳴 梅豆羅古枳駄樓은 저쪽에 떨어진 壹岐 해협을 건너 對馬로 왔다는 의미가 된다. 이 노래 앞에는 目頰子가 처음 임나에 도착했을 때 目頰子가 壹岐의 해협을 통해서 任那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任那가 朝鮮半島의 남단에 있었다면, 壹岐를 건너가 아니고 對馬를 건너가 될 것이다.(山田宗睦 日本書紀(中)".」
위와 같은 견해는 많은 일본 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明治時代나 일본 軍國主義 시대 일본의 우익 사학자들은 任那는 한반도 남부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宋書, 南齊書 등에 任那가 加羅와 함께 거론되어 있고, 翰苑 新羅傳에 任那와 加羅가 新羅 남쪽에 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讚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聽.」 宋書
「元嘉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宋書
「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
「順帝昇明二年遣使上表曰....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宋書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南齊書
「齊建元中除武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鎭東大將軍.」 南史
「括地志云 案宋書 元嘉中 倭王彌自稱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慕韓六國諸軍事 此則新羅有國在晉宋之間 且晉宋齊梁 普普並無正傳 故其有國所由 靡得詳也 金水晉宋之也 .」翰苑 新羅傳
「地惣任那 齊書云 加羅國三韓種也 今訊新羅耆老云 加羅任那昔爲新羅所滅 其故今並在國南七八百里 此新羅有辰韓卞辰廿四國及任那加羅慕韓之地也.」 翰苑 新羅傳
日本書紀 崇神天皇紀 65년조 문구나 繼體天皇 24년 10월조 문구에 의하면 任那의 위치는 對馬島인데도 왜 宋書나 南齊書 등에는 任那가 加羅와 함께 거론되어 있고, 翰苑 新羅傳에는 任那와 加羅가 新羅 남쪽에 있는 것으로 적혀 있을까? 또 欽明天皇紀에 나오는 任那 문구 중 일부는 그 위치를 경상도 남부지방 또는 전라도 남부지방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경상도 남부지방과 전라도 남부지방을 任那라고 부른 이유를 이해하려면 古記에 나오는 任那聯政을 이해하여야 한다. 欽明天皇紀에 나오는 任那 문구 중 일부는 任那聯政에 속했던 옛 加耶 지방과 百濟 남부지방을 가리킨다.
古記에 나오는 任那聯政은 廣開土王이 對馬島, 日本列島倭, 百濟, 新羅, 加耶를 복속시키고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연립정부이다. 이 聯政의 治所는 任那(대마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聯政을 任那聯政이라 불렀다. 對馬島를 뜻하는 任那와 任那聯政을 뜻하는 任那는 의미가 전혀 다르므로 꼭 구별해야 한다.
아래에 나오는 任那는 對馬島라는 뜻이 아니고 任那聯政 또는 任那聯政 지역이라는 뜻이다.
「일본에는 옛날에 이국(대화왜)이 있었다. 또 이세라고도 한다. 왜(구주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북구주)에 있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日本舊有伊國 亦曰伊勢 與倭同隣 伊都國在筑紫 亦卽日向國也 自是 以東屬於倭 其南東屬於安羅 安羅本忽本人也 北有阿蘇山 安羅後入任那 與高句麗 早己定親」桓檀古記 大震國本紀
「임나는 원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게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대마도와 구주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A.D 400년)에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 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首邑指稱也 自是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屬新羅 仁位加羅屬高句麗 계知加羅屬百濟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然直割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위 내용을 정리하면 日本書紀 崇神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는 對馬島를 가리키나,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는 對馬島 또는 加耶 지방을 가리킨다.
崇神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는 원래부터 倭人들이 任那라고 부른 곳이다. 그러나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는 A.D 400년 이후 任那聯政이 설치된 후 任那聯政에 속한 지역을 任那라고 부른 곳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任那聯政에 속한 지역은 新羅, 百濟, 加耶 지역이나, 新羅와 百濟는 늦어도 A.D 418년 이전에 任那聯政의 세력권에서 벗어났으므로, 欽明天皇 시대에 한반도 남부에서 任那라고 부른 지역은 경상도 남부지방과 전라도 남부지방이다.
日本書紀 欽明天皇本紀에는 당시 百濟와 新羅가 대치한 對馬島와 한반도 남부 加耶 지방 2곳이 모두 任那로 적혀 있어 사학도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欽明天皇 시대에 新羅와 百濟가 對馬島와 加耶 지방 2곳에서 대치하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
A.D 479년에 任那聯政이 붕괴된 후 任那聯政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加耶 지방의 小國들은 독립세력이 되었으나, 百濟와 新羅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加耶 小國들은 나라의 존립을 위하여 당시 南齊를 등에 업고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百濟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그후 A.D 501년에 日本列島倭가 지원한 武寧王系가 반란을 일으켜 東城王이 죽고 東城王을 지지한 中國東海岸地方과 遼西地方 출신들이 모두 몰락하고 日本列島倭가 지원한 武寧王이 즉위하자 중국동해안지방과 요서지방에 있는 百濟 將領들이 이에 반발하여 고구려에 歸服하므로서 百濟는 중국동해안지방과 요서지방을 상실하여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新羅는 百濟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加耶 지방으로 진출하여 지증마립간 15년(A.D 514년)에 阿尸良國(함안)을 병합하였고, 法興王 9년(A.D 522년)에는 新羅 여인을 金官加耶 왕의 왕비로 주어 金官加耶를 新羅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였으며, 法興王 19년(A.D 532년)에는 金官加耶를 병합하여 欽明天皇이 즉위할 무렵에는 高靈加耶를 제외한 나머지 加耶國들을 모두 병합하였다. 新羅는 高靈加耶를 제외한 대부분의 加耶地方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더 서쪽으로 진출하려 하였고, 百濟는 九禮山 등지에서 新羅의 西進을 막았다.
新羅는 加耶 지방으로 진출하는 한편 百濟와 倭 간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기 위하여 繼體天皇 21년(A.D 527년) 이전에 對馬島 북부에 진출하여 南加羅, 喙己呑을 점령하였고, 繼體天皇 23년(A.D 529년)에는 伴跛國의 8城을 빼앗았으며, 欽明天皇 2년(A.D 541년 이전에 對馬島 북부에 있는 卓淳國을 점령하였다. 新羅는 對馬島 북부에 있는 南加羅, 喙己呑 등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對馬島를 완전히 점령하여 百濟와 倭 간의 해상통로을 완전히 차단하려 하였고, 百濟와 大和倭는 이를 막으려 하였다. 이때 大和倭는 百濟와 任那의 여러 小國의 旱岐들과의 협조를 위하여 大和倭의 臣과 將軍들을 任那에 파견하였다. [참고 527년에는 아직 금관가야(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되기 전이다. 따라서 위에 나오는 남가라 등은 대마도에 있는 소국들이다. 대마도에 한반도 남부 가야지방에 있던 南加羅, 喙己呑, 卓淳國 등 명칭이 나오는 것은 고대에 加耶 지방에 살던 무리들이 對馬島 등지로 이주하여 이주한 곳에서 전에 살던 根國의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欽明天皇 시대에는 新羅와 百濟가 대치한 곳은 對馬島와 한반도 남부 加耶地方이다. 그런데 欽明天皇本紀에는 百濟와 新羅 간에 對馬島에서 일어난 사실과 한반도 남부 加耶地方에서 일어난 사실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어 적혀 있다. 그때문에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는 어떤 때는 對馬島를 가리키고, 어떤 때는 한반도 남부 加耶地方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日本書紀에 나오는 日本府에 대하여 살펴본다.
日本書紀 雄略天皇本紀와 欽明天皇本紀에는 日本府가 나온다. 그런데 雄略天皇紀에 나오는 日本府와 欽明天皇紀에 나오는 日本府는 명칭은 같으나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르다.
먼저 任那聯政時代인 雄略天皇本紀에 나오는 日本府를 살펴본다.
任那聯政시대에 나오는 日本府는 任那聯政王의 요구에 따라 大和倭에서 臣 또는 將軍들을 任那에 주재시킨 곳이다. 그 때문에 雄略天皇本紀에 나오는 日本府의 臣 또는 將軍들은 任那聯政王의 지시를 받았다.
「웅략천황(雄略天皇) 8년 봄 2월 전략. 천황의 즉위 이래 신라국이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은 지가 8년이 되었다. 그리고는 천황의 마음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와 수호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왕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뒤 고구려의 한 군사가 잠깐 동안 귀국하였다. 그때 신라인을 마부로 하였다. 몰래 말하여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게 패할 것이 오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혹본에는 그대의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되는 것이 오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마부는 듣고서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는 흉내를 내고 물러나 뒤에 처졌다. 드디어 나라 안으로 도망하여 그 말한 바를 전하였다.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 주는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달려가 "사람들이여 가내에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고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국내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다. 그때 한 고구려인이 남아 틈을 타 탈출하여 자기 나라에 도망쳐서 모두 상세하게 말하였다. 고구려왕이 즉시 군병을 일으켜 축족유성(혹본에는 도구사기성)에 주둔하였다. 가무하며 음악소리를 내었다. 신라왕은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가무하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 온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임나왕에게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는 매달려 있는 깃발과 같다. 나라의 위태로움은 누란의 위기보다 더하다. 명의 장단도 헤아릴 수 없다. 엎디어 일본부의 장군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임나왕은 선신, 길비신소리, 난파길토역목자 등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도와주게 하였다. 선신 등이 가는 도중에 야영하였다. 고구려의 제장이 선신과 싸우지 않았는데도 두려워 하였다..중략..두 나라의 원한이 이에서 생겼다. 八年春二月 遣身狹村主靑・桧隈民使博德使於呉國 自天皇即位 至于是歳 新羅國背誕 苞苴不入 於今八年 而大懼中國之心 脩好於高麗 由是 高麗王遣精兵一百人守新羅 有頃 高麗軍士一人 取假歸國 時以新羅人爲典馬 [典馬 此云于麻柯比] 而顧謂之曰 汝國爲吾國所破非久矣 [一本云 汝國果成吾土非久矣] 其典馬聞之 陽患其腹 退而在後 遂逃入國 説其所語 於是 新羅王乃知高麗僞守 遣使馳告國人曰 人殺家内所養鷄之雄者 國人知意 盡殺國内所有高麗人 惟有遣高麗一人 乘間得脱 逃入其國 皆具爲説之 高麗王即發軍兵 屯聚筑足流城 [或本云 都久斯岐城] 遂歌儛興樂 於是 新羅王 夜聞高麗軍四面歌儛 知賊盡入新羅地 乃使人於任那王曰 高麗王征伐我國 當此之時 若綴旒然 國之危殆 過於累卵 命之脩短 太所不計 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由是 任那王勸膳臣斑鳩 [斑鳩 此云伊柯屢餓]・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徃救新羅 膳臣等 未至營止 高麗諸將 未與膳臣等相戰皆怖 膳臣等乃自力勞軍 令軍中 促爲攻具 急進攻之 與高麗相守十餘日 乃夜鑿險 爲地道 悉過輜車 設奇兵 會明 高麗謂膳臣等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歩騎夾攻 大破之 二國之怨 自此而生 [言二國者 高麗新羅也] 膳臣等謂新羅曰 汝以至弱 當至強 官軍不救 必爲所乘 將成人地 殆於此役 自今以後 豈背天朝也」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日本府는 對馬島 북부를 점령한 新羅를 任那(대마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百濟의 요청에 따라 大和倭의 臣 또는 장군들을 任那에 주재시킨 곳이다. 그 때문에 欽明天皇紀에 나오는 日本府의 臣과 將軍들은 백제왕의 지시를 받았다.
「흠명천황 2년(A.D 541년) 여름 4월, 안라의 차한지,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와 졸마의 한지와 산반해의 한지의 아들과 다라의 하한지 이타와 사이기의 한지의 아들, 자타의 한지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과 백제에 가서 같이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이 임나의 한지들에게 “일본 천황의 조칙은 오르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재건할 것인가.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펼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의 한지 등이 "먼저 재삼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한 바를 다시 신라에 이른다 하여도 보고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어 천황께 주하십시오.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교지를 받들려고 하는데 누가 감히 사이에 말을 넣겠습니까. 임나의 경계가 신라와 접해 있어서 탁순 등이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고 말하였다. 성명왕이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의 치세 때 안라, 가라, 탁순의 한지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 속임을 받고 천황의 노여움을 사서 임나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 중좌평 마로, 성방 갑배매노 등을 보내어 신라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에 모여 맹세를 하게 하였다. 이후 다른 일에 얽매였으나, 임나를 재건하는 것을 조석으로 잊은 적이 없다. 지금 천황이 詔하여 '속히 임나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따라 그대들과 계책을 세워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려고 한다. 잘 생각하라. 또 임나의 경계에서 신라를 불러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같이 사신을 보내어 천황께 주상하고 교시하여 달라고 하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을 할 것이다.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그대들의 말대로 탁순 등의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함은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훼기탄은 신라와 가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리라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자세히 보니 삼국의 패망은 다 까닭이 있다. 옛적에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쳤으나 그래도 이기지 못하였다. 신라가 어찌 혼자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은 그대들과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의 힘을 빌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가 있었다. 다 기뻐서 돌아갔다. 夏四月 安羅次旱岐夷呑奚 大不孫 久取柔利 加羅上首位古殿奚 卒麻旱岐 散半奚旱岐兒 多羅下旱岐夷他 斯二岐旱岐兒 子他旱岐等 與任那日本府吉備臣(闕名字) 往赴百濟 俱聽詔書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 日本天皇所詔者 全以復建任那 今用何策 起建任那 各盡忠 奉展聖懷 任那旱岐等對曰 前再三廻 與新羅議 而無答報所圖之旨 更告新羅尙無所報 今宜俱遣使 往奏天皇 夫建任那者 爰在大王之意 祗承敎旨 誰敢間言 然任那境接新羅 恐致卓淳等禍(等謂喙己呑加羅 言卓淳等國有敗亡之禍) 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 貴首王之世 安羅 加羅 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0隆 而今被광新羅 使天皇忿怒 而任那憤恨 寡人之過也 我深懲悔 而遣下部中佐平麻鹵 城方甲背昧奴等赴加羅會干任那日本府相盟 以後繫念相續 圖建任那 旦夕無忘 今天皇詔稱 速建任那 由是欲共爾曹謨計 樹立任那國 宜善圖之 又於任那境 徵召新羅 問聽與不 乃俱遣使奏聞天皇 恭承示敎 당如使人未還之際 新羅候隙侵逼任那 我當往救 不足爲憂 然善守備 謹警無忘 別汝所도 恐致卓淳等禍 非新羅自强故所能爲也 其喙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爾狹小 不能卒備 不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因斯而觀三國之敗 良有以也 昔新羅請援於高麗 而攻擊任那與百濟 尙不剋之 新羅安獨滅任那乎 今寡人與汝戮力幷心 예賴天皇 任那必起 因贈物各有差 而還」
「흠명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는 안라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매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으로 알았다". 같이 천황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집안을 온전히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선조가 전의 한지와 화친할 때 한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은 바 있다. 이후 이웃과 화친을 닦아서 이웃나라에 후하게 하였다. 은혜가 골육을 넘어섰다. 처음을 착하게 하고 끝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항상 원하는 바이다. 모르겠다. 어째서 쉽게 헛소리를 듣고 몇 해 사이에 근심하고 뜻을 잃었는가. 옛말에 '후회막급이라'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위는 창공에 다다르고 아래는 지하에 이르기까지 맹세코 허물을 고칠 것이다. 하나도 숨김없이 할 바를 밝히겠다. 정성이 신에 통하고 깊이 자기를 책하는 것은 역시 취할 바가 있다. 듣건데 선대의 뒤를 잇는 자는 선조의 가던 길을 그대로 가고 부조의 업을 이어받아 공훈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지금 선세의 화친한 호의를 생각하고 천황의 조칙의 말에 따라 신라에게 빼앗긴 남가라, 훼기탄을 빼앗아 그 전대로 임나에 옮기고 길이 부형의 나라가 되어 일본을 섬길 것이다. 이는 과인이 먹어도 맛이 없고 자도 자리가 불안한 바이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금후를 경계하여 조심스럽게 행할 것이다. 신라가 감언으로 속이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그대들은 맹신하여 이미 타인의 모략에 빠졌다. 지금 임나의 경계는 신라와 접하고 있다.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 할 것인가. 간계에 빠져 버리면 나라를 잃고 집을 망하게 하고 사람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한다. 과인이 이를 생각하고 걱정하여 안심하지 못한다. 임나와 신라가 계략을 꾸미는 자리에도 벌과 뱀의 흉칙한 본성을 드러냈다는 것을 들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재앙의 전조는 행동을 경계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변은 사람에게 그 깨달을 바를 알린다. 이는 곧 하늘의 경계이고 선조의 영혼의 징표다. 화가 온 다음에 후회하고, 멸망한 다음에 일어서겠다고 생각하여도 어림없는 일이다. 그대는 나를 따라 천황의 칙을 들어 임나를 일으켜라.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가. 길이 본토를 보존하고 구민을 다스리고 싶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다. 신중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이 또 임나의 일본부에 "천황이 조하여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다. 만일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 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고 하였다. 삼가 조칙을 받들어 송구한 마음이 가슴에 찼다. 정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를 융성하게 할 것을 기원하였다.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 장래를 염려한 연후에 안락할 것이다. 지금 일본부는 조한 바와 같이 임나를 구조하면, 이는 천황이 반드시 칭송할 것이고, 그대의 몸도 포상을 받을 것이다. 또 일본의 경 등은 오래 임나의 나라에 머물러서 가까이 신라의 경계와 접하고 있다. 신라의 정상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임나를 해하고 일본에 반항하려고 한다. 그 유래는 길다. 올해부터가 아니다. 그래도 감히 움직이지 않는 것은 가깝게는 백제를 경계하고 멀리는 천황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을 섬기는 척하며 거짓 임나와 화해했다. 임나의 일본부를 기쁘게 한 것은 아직 임나를 빼앗기 전이니까 거짓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원컨데 그 틈을 엿보고, 그 불비를 보고서, 한번 군사를 일으켜 공략할 것이다. 천황이 조칙으로 남가라, 훼기탄을 세우라고 권한 것은 수십년의 일만은 아니다. 그런 것을 신라가 하나같이 명을 듣지 않는 것은 경 등이 아는 바이다. 천황의 조칙을 믿고 임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하여도 될 것인가. 경 등은 쉽게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을 믿어,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하는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경은 경계하여 타인에게 속지 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秋七月 百濟聞安羅日本府與新羅通計 遣前部奈率鼻利莫古 奈率宣文 中部奈率木리昧淳 紀臣奈率彌麻沙等(紀臣奈率者 盖是紀臣娶韓婦所生 因留百濟爲奈率者也 未詳其父 他皆效此也) 使于安羅 召到新羅任那執事 謨建任那 別以安羅日本府河內直 通計新羅 深責罵之(百濟本記云 加不至費直 阿賢移那斯 佐魯麻都等 未詳也)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 與故旱岐等 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 共事天皇 俱距强敵 安國全家 至于今日 言念先祖 與舊旱岐 和親之詞 有如교日 自玆以降 勤修隣好 遂敦與國 恩踰骨肉 善始有終 寡人之所 願 未審 何緣輕用浮辭 數歲之間 慨然失志 古人云 追悔無及 此之謂也 上達雲際 下及泉中 誓神乎今 改咎乎昔一無隱匿 發露所爲 請誠通靈 深自克責 亦所宜取 盖聞 爲人後者 貴能負荷先軌 克昌堂構 以成勳業也 故今追崇先世和親之好 敬順天皇詔勅之詞 拔取新羅所折之國 南加羅 喙己呑等 還屬本貫 遷實任那 永作父兄 朝日本 此寡人之所食不甘味 寢不安席 悔往戒今之 所勞想也 夫新羅甘言希 天下之所知也 汝等妄信 旣墮人權 方今任那境接新羅 宜常設備 豈能弛柝 爰恐 陷리誣欺網穽 喪國亡家 爲人繫虜 寡人念玆 勞想而不能自安矣 竊聞 任那與新羅運策席際 現蜂蛇怪 亦衆所知 且夫妖祥 所以戒行 災異所以悟人 當是 明天告戒 先靈之徵表者也 禍至追悔 滅後思興 孰云及矣 今汝遵余 聽天皇勅 可立任那 何患不成 若欲長存本土 永御舊民 其謨在玆 可不愼也 聖明王更謂任那日本府曰 天皇詔稱 任那若滅 汝則無資 任那若興 汝則有援 今宜興建任那 使如舊日 以爲汝助 撫養黎民 謹承詔勅 悚懼塡胸 誓效丹誠 冀隆任那 永事天皇 猶如往日 先慮未然 然後康樂 今日本府 復能依詔 救助任那 是爲天皇 所必襄讚 汝身所當賞祿 又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 新羅情狀 亦是所知 毒害任那 謨防日本 其來尙矣 匪唯今年 而不敢動者 近羞百濟 遠恐天皇 誘事朝廷 僞和任那 如斯感激任那日本府者 以未禽任那之間 僞示伏從之狀 願今候其間隙 점其不備 一擧兵而取之 天皇詔勅 勸立南加羅 喙己呑 非但數十年 而新羅一不聽命 亦卿所知 且夫信敬天皇 爲立任那 豈若是乎 恐卿等輒信甘言 輕被만語 滅任那國 奉辱天皇 卿其戒之 勿爲他欺」
百濟와 大和倭가 新羅에 점령당한 南加羅, 喙己呑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은 繼體天皇 21년조(527년)부터 나타난다. 이는 만약 新羅에 의하여 對馬島가 완전히 점령되어 大和倭와 百濟 간의 통로가 차단되면 百濟와 大和倭 모두 고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는 아직 金官加耶(南加羅)가 新羅에 병합되기 전이므로, 위에 나오는 南加羅, 喙己呑은 對馬島 북부에 있는 小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廿一年夏六月壬辰朔甲午 近江毛野臣 率衆六萬 欲往任那 爲復興建新羅所破南加羅喙己呑 而合任那 21년 여름 6월 近江 毛野臣은 6만의 군사를 이끌고 任那에 가서 新羅에 패한 바 있는 南加羅, 喙己呑을 회복하고 부흥시켜 任那에 합치고자 하였다.」
「廿三年春三月...是月 遣近江毛野臣 使于安羅 勅勸新羅 更建南加羅 喙己呑 百濟遣將軍君尹貴 麻那甲背 麻鹵等 往赴安羅 式聽詔勅 新羅 恐破蕃國官家 不遣大人 而遣夫智奈麻禮 奚奈麻禮等 往赴安羅 式聽詔勅 이달 近江 毛野臣을 安羅에 사신으로 보냈다. 新羅에 권하여 다시 南加羅, 喙己呑을 세우려 하였다.」
大和倭와 百濟가 對馬島 북부를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은 繼體天皇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시 중지되었다. 日本書紀에는 繼體天皇이 갑자기 죽은 이유가 나오지 않으나 아마도 정변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廿五年...冬十二月丙申朔庚子 葬于藍野陵 [或本云 天皇 廿八年歳次甲寅崩 而此云廿五年歳次辛亥崩者 取百濟本記爲文 其文云 大歳辛亥三月 軍進至于安羅 營乞乇城 是月 高麗弑其王安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 倶崩薨 由此而言 辛亥之歳 當廿五年矣 後勘校者 知之也] 25년 겨울 12월 藍野陵 에 장사재냈다.[或本에 천황이 28년 세차 갑인에 崩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을 여기에 25년 歲次 辛亥에 崩하였다고 한 것은 百濟書記의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글에 말하기를 太歲 辛亥 3월에 군사가 安羅에 가서 乞乇城에 주둔하였다. 이달에 고구려가 그 왕 安을 죽였다. 또 들으니 일본의 天皇 및 太子, 皇子가 모두 다 죽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하면 신해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勘校하는 자는 알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繼體天皇이 죽은 후 즉위한 安閑天皇과 宣化天皇은 재위 2-4년만에 죽고 그 뒤 欽明天皇이 즉위하였다.
「志歸嶋天皇(흠명천황)이 천하를 다스린 지 41년이 되었다. 辛卯년 4월에 죽었다. 陵은 檜前의 坂合岡에 있다.」 上宮聖德法王帝說
志歸嶋天皇(흠명천황)은 신묘년(571년)에 죽었는데, 欽明天皇의 치세 41년을 역산하면 欽明天皇의 즉위년은 531년(辛亥)이다. 이 해는 바로 繼體天皇이 죽은 해이다. 이렇게 되면 安閑天皇, 宣化天皇은 가공천황이거나 아니면 欽明天皇과 같은 시대에 각 天皇을 칭하였다가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安閑天皇, 宣化天皇이 정변으로 죽었다는 것은 安閑天皇과 그 가족들이 재위 2년 12월에 함께 능에 묻혔다는 사실과 宣化天皇 역시 재위 4년 11월에 천황과 그 가족들이 함께 능에 묻혔다는 문구로 추정할 수 있다.
「冬十二月癸酉朔己丑 天皇崩于勾金橋宮 是年七十 是月 葬天皇于河內舊市高屋丘陵 以皇后春日山田皇女及天皇妹神前皇女 合葬于是陵.」安閑天皇 2年 12月條
「四年春二月乙酉朔甲午 天皇崩于檜隈廬入野宮 時年七十三 冬十一月庚戌朔丙寅 葬天皇于大倭國身狹桃花鳥坂上陵 以皇友橋皇女及其孺子 合葬于是陵.」宣化天皇 4年 2月條
繼體天皇은 527년에 新羅가 對馬島 북부를 점령하여 大和倭와 百濟 간의 해상통로를 차단하려 하자 近江 毛野臣을 보내어 新羅를 물리치고 任那를 바로 세우려 하였으나, 近江 毛野臣이 新羅를 몰아내는데 적극적이지 않자 近江 毛野臣을 소환하였으나, 近江 毛野臣은 대마도에서 죽었다.
新羅는 繼體天皇이 죽은 후 任那 회복이 일시 중지되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金官加耶를 압박하여 항복받았다.
그뒤 欽明天皇이 즉위한 후부터 다시 百濟와 연합하여 新羅를 任那에서 몰아내려 하였다.
欽明天皇紀에는 재위 2년부터 日本府가 나온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百濟가 任那 小國의 旱支들과 협력하여 任那(대마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는 新羅를 몰아내어 百濟와 大和倭 간의 해상통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大和倭의 臣과 장군들을 任那(대마도)에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欽明天皇은 재위 2년(A.D 541년) 4월부터 13년(A.D 552년) 사이에 任那에 日本府를 두고 百濟와 공조하였다. 欽明天皇紀 2년(A.D 541년) 4월조부터 13년조(A.D 552년) 사이에만 日本府가 나오고 欽明天皇 14년(A.D 553년)과 15년(A.D 554년) 조에는 日本府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A.D 553년에 新羅가 百濟의 동.북 변읍을 빼앗고 백제왕의 딸을 소비로 삼았고, A.D 554년에 內臣이 거느린 水軍이 對馬島에서 新羅의 제지를 받지 않고 바로 百濟로 간 것으로 보아, 아마도 新羅는 A.D 553년경에 점령 가능성이 없거나 점령해도 별로 실익이 없는 對馬島 점령과 해상통로 차단을 포기하고 對馬島 북부에 주둔시켰던 군사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對馬島에 주둔했던 新羅軍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므로서 大和倭와 百濟 간의 해상통로가 열리자 大和倭 지원군은 百濟를 지원하기 위하여 A.D 554년에 百濟로 출동하였으나 백제 聖王이 新羅軍에 붙잡혀 죽자 大和倭 지원군은 도로 日本으로 돌아갔다.
앞에 나온 내용을 정리하면 日本書紀에 나오는 任那 관련 기사는 대부분 對馬島에 관한 기사이다. 다만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任那 관련 기사 중 일부는 한반도 남부 加耶 지방에 관한 기사이다. 그리고 雄略天皇 시대에 나오는 日本府는 任那聯政王의 요구에 따라 大和倭가 臣과 將軍들을 任那에 주재시킨 곳이고, 欽明天皇本紀에 나오는 日本府는 百濟가 任那 小國의 旱支들과 협력하여 任那(대마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는 新羅를 몰아내어 百濟와 大和倭 간의 해상통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大和倭의 臣과 將軍들을 任那(대마도)에 주재시킨 곳이다. 그 때문에 雄略天皇本紀에 나오는 日本府의 臣과 將軍들은 任那王의 지시를 받았고, 欽明天皇紀에 나오는 日本府의 臣과 將軍들은 百濟王의 지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