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川王대 壁碑

 

전에 토지박물관에서 동천왕 시대 상황을 적은 壁碑 3종을 공개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는 八綾碑는 이미 공개된 바 있다.

壁碑 소장자 주장으로는 이 壁碑는 1930년대에 북한에서 발견된 것을 소장자가 입수하여 여태까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八綾碑 소장자 주장으로는 八綾碑는 19세기 만주 요녕지방에서 발견된 것을 소장자가 입수하여 여태까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비(碑)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강단사학자들은 외부적으로는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진품일 가능성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다. 반면에 재야에서는 이 비(碑)를 거의 진품으로 단정하고 구구한 해석을 하고 있다. 토지공사의 주장으로는 열형광연대측정법으로 제작연대를 측정하였다고 하나, 이 방면 전문가의 주장으로는 고대에 만들어진 도기 조각을 갈아서 그 가루로 벽비를 만들 경우 식별이 어렵다고 한다. 과학적 전문지식은 제처두고라도 이 벽비 문구나 글자체 등에서 진품으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壁碑를 진품으로 보지 않고 어떤 古文書를 근거로 하여 19-20세기에 만든 僞作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이 壁碑를 僞作으로 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4종류의 비문을 살펴 본다.

 

1.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

 

가.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 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 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繼明帝 還(逐)(多)護(寧)東百殊 司吏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以?)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 永傳百世存祖. 위 명제 청룡 계축년으로부터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왕은 현현궁 삼태읍장에게 명하여 보기 200과 魏나라로 가게 하였다. (후에) 도성으로 돌아와 삼가 분부하신 광대한 계책대로 하였다고 복명하였다..중략..짐승들이 이상한 징후를 보이며 시조 사당 전실에 떨어져 죽자 백수는 의식을 멈추었다. (백수는) 明帝에 이어 (齊王 때도) "逐多護寧東百殊"가 되어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를 두니, 평안하고 태평하며 예악이 있는 세월이 고구려에 이어젔다. 殊는 天府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고,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레 보살피려 하였다. 위나암성으로 가서 흘계를 (보내어) 3천국 졸본읍도를 만들 게 하고,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지냈다. 이를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린다. 나라를 회복하고 도읍을 다시 만드는 기쁨을 천부궁에서 日月神을 참배하여 알리고 天神地祗에게 제사지냈다. 무리들이 邑長, 百長, 國殊 등과 정성을 다하여 壁碑를 세우니 (고구려는) 백세토록 영원히 이어지고 始祖는 영원하리라.」[註:계축년은 명제 청룡 원년으로 A.D 233년이고, 동천왕 11년은 A.D 237년이다. 이로 보아 청룡계축 뒤에 나오는 "二"는 "五"인데, 일부 획이 희미해져 "二"로 보인 것이다. 그리고 慾殺鎩는 잘못 새긴 것이다.]

 

 

나. 「正始武侵 宮百殊固諫慾鎩 還亡命存其固都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  (委+台)七年(246년)十月繼明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 殊代天府祖鄒牟王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旨?)記天地之中 銘存永世 隨登愿 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정시년간에 침범이 있었다. (침범이 있기 전) 동천왕은 백수가 간하자 죽이려 하였다. 백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례 보살피려 하였다. 흘계를 보내 (새로운) 도읍을 만들고 殊와 百位와 고구려 지역 추장들을 보호하였다. 정시 7년(서기 246년) 10월에 明帝에 이어 (제)왕이 (백수를) "護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하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殊는 城民의 뜻에 따라 天府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었다. (?년) 가을 8월 보기병 2천으로 싸워 毋丘儉은 혁현령에서 수천리를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 수천명을 항복받았다. 毋丘儉이 궁성 북쪽을 뚫자 東川王은 신하들 앞에서 고구려를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왕의 뜻으로 천지간에 일어난 일을 새겨 영원히 보존하고 때마다 윗사람에게 바쳐 보이고, 이 비를 영원히 세워두고, 이로써 백세를 전하게 하여 百殊 성민은 대대로 이 碑를 보라.」[註 동천왕 시대에 "護" 字를 간체인 "护"로 정말 사용하였는지 심히 의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위 壁碑는 후에 중국이 간체를 사용한 시기에 위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제일 앞에 나온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

 

 

다.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食蒿而死 殊還亡命 慾鎩 存其都 將誠不耐城 往丸都遣訖繼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宣. 정시년간에 병란이 끝났다. 동천왕은 간곡히 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죽이려 하였다. (  )는 쑥만 먹다가 죽었다. 殊는 망명에서 돌아와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레 보살피려 하였다. 환도에 가서 흘계를 보내 (새로운) 도읍을 만들고 位와 殊와 고구려 지역 추장들을 보호하였다. 위나라 정시 7년(246년) 백수가 선포하노라. [註 慾鎩은 宮不從固諫 뒤에 와야 하는데 새길 때 실수하였다. 또 제일 앞에 나온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2. 흙으로 구워만든 8면 기둥

 

라.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故邑遂成 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의 옛 읍을 이어받았다. (제)왕 10년(248년)에 동서남북수는 명제에 이어 "逐多護寧東百殊"가 되어 관아와 관리를 玄菟에 두고 都邑을 沸流에 두어 다스리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殊가 天府를 대신하였고, 시조 추모왕의 뜻을 계승하여 백성들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百殊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년 공들여 튼튼한 도읍을 玄菟郡에 건축하여 나라를 계속하였다.

 

 

3. 비문 내용의 특이점과 비문간 비교

 

전체 비문을 보면,

 

4가지 비문의 글자체가 모두 똑같지 않다. 즉 동일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八綾碑를 몰라도 토지공사가 공개한 다른 3비는 내용이 거의 같은데도 동일인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용이 같지만 각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 비를 만들 때 어떤 고문서를 보고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4가지 비문 모두 글자체 모양은 魏.晋 시대부터 보이는 楷書와 行書가 가미된 글자체 모양을 가지고 있다. 楷書와 行書는 後漢 때 학자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 서체로서 나타난 시기는 魏.晋 시대부터이다. 따라서 이 4가지 비문 모두 魏.晋 시대 이후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 비문에는 간체자가 나온다. 간체자는 南北朝時代(4-6C)의 碑刻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이 비문에는 4-5세기경이 되어서야 보이는 "麓" 자가 보인다. 만약 위 비문이 진짜라면 아무리 제작시기를 올려잡아도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즉 이 비문은 관구검의 침범이 있은 3세기경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이 비문에는 모택동식 간체의 특징을 가진 繼를 紒로, 正을 井으로, 護를 护로 적은 간체자가 나온다. 이 비문에 모택동식 간체자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비문이 위작된 시기는 모택동식 간체자가 만들어진 20세기경에 위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택동식 간체자의 특징 중 하나는 어려운 한자를 발음이 같고 쉬운 한자로 대치하여 간체자를 만드는 것이다.

 

(가.) 비문을 보면,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 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 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繼明帝 還(逐)(多)護(寧)東百殊 司吏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以?)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 永傳百世存祖.」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위나라 명제 칭호는 그대로 적으면서 동천왕은 東主로 적고 있다. 이를 보면 이 비문은 중국왕조와 관련된 사람이 이 비문을 적었다. 그리고 문장 끝부분에 나오는 이 벽비의 주체자는 東川王이 아니고 "邑長, 百長, 國殊" 등이다. 邑長, 百長은 위나라가 위나라에 귀부한 東夷族 渠帥들에게 내린 하급 관작이다. 이를 보면 이 碑를 만든 사람들은 東川王이 아니라 위나라에 귀부한 유마힐도 고위 승려 또는 위나라에 歸附하여 邑長, 百長 등 관작을 받은 고구려 지역 渠帥들이다.

"繼明帝" 문구로 보아 이 碑는 明帝 이후에 만들어 졌다. 또 "護(寧)東百殊" 문구를 보면 百殊는 위나라로부터 護(寧)東百殊 관작을 받았다. 백수가 위나라로부터 護(寧)東百殊 관작을 받은 것이나, 고구려가 위나라의 현도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사실상 위나라의 반 속국 상태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대성통곡을 해도 시원찮을 일인데 그것을 축하할 일이라고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라고 적었다. 따라서 이 비문은 東川王을 추겨 올리는 것이 아니라 邑長, 百長, 國殊등을 추켜 올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문맥 중에 "慾殺鎩"이 들어 있는 것은 이 비문을 위작(僞作)한 자가 서지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다른 자료에 있는 것을 혼동하여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가.) 비문 전체를 간추려 보면 백수는 죽을려고 한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이 碑는 동천왕의 뜻에 의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邑長, 百長, 國殊 등 위나라에 歸附한 고구려 지역 渠帥와 유마힐도 고위 승려들의 뜻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왕권이 강한 왕조시대에 이런 짓 하면 3족이 몰살당한다. 그런데도 이 碑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이 碑를 만들 시기 東川王은 邑長, 百長, 國殊 등에 의하여 왕권이 심히 제약당해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비문이 진짜라면 관구검 침범 이후 한동안 고구려 지역 위나라에 귀부한 토착거수들과 유마힐도 고위 승려들이 왕권을 제약하였다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필자는 이 비문은 가짜로 본다. 하지만 이 비문을 僞作할 당시 참조한 고문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벽비 문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 비문을 보면,

 

「正始武侵 宮百殊固諫 慾鎩 還亡命存其固都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  (委+台)七年(246년)十月 繼明 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 殊代天府祖鄒牟王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旨?)記天地之中 銘存永世 隨登愿 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이 비문에는 "慾鎩"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 다른 비문에는 이 "慾鎩"을 잘못 집어넣거나 넣지 않아야 될 곳에 넣어 뜻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또 (가.)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그리고 이 비문의 "繼明 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문구에는 "明" 자 뒤에 "帝" 자가 빠져 있다. 아마 이 비문을 위작한 사람이 서지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백수를 "护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한 사람은 魏 明帝 뒤 중국황제이다. 백수가 "护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해진 정시 7년(246년)은 위나라 제왕(齊王) 시대이다. 혹자는 이 明王 문구를 보고 고구려 유리명왕이라고 주장하나, 죽은 유리명왕이 무덤에서 나와 서기 246년에 백수에게 "护寧東國吏玄菟沸流" 작위를 내리고 봉책을 할 수 없다.

 

(다.) 비문을 보면,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A 食蒿而死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往丸都遣訖繼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宣」

 

이 비문에는 "慾鎩"을 A 자리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을 위치를 잘못 잡았다. 아마 이 비(碑)를 위작한 사람도 서지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몰라서 그런 모양이다. 또 (가.)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그리고 "魏正始七年 百殊宣"이라고 하여 동천왕의 역할을 백수가 하고 있다. 그 앞의 문구도 유마힐교의 승려 최고 우두머리에 불과한 백수가 동천왕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백수를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고 유마힐교 최고 우두머리 승려 관직이다.

 

(라.) 비문을 보면,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 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이 비문을 보면 백수가 마치 고구려를 통치한 듯이 적혀 있다. 아마 자신들을 자랑하기 위하여 과장한 문구일 것이다.

이 문구에 나오는 "遂成 王十年"에 대하여 수성왕(차대왕)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위 문구를 보면 東西南北殊는 왕 10년에 魏 明帝에 이어 그 다음 중국왕으로부터 "护寧東百殊" 관작을 받았다. 수성왕(차대왕)은 146-165년 사이 재위한 고구려 왕인데 수성왕 10년은 서기 155년이다.

東西南北殊는 魏 明帝(226-239년)에 이어 그 다음 왕으로부터도 "护寧東百殊" 관작을 받았는데, 東西南北殊가 관작을 받은 시기는 魏 明帝가 죽은 A.D 239년 이후이다. 따라서 위 문구에 나오는 왕은 수성왕(차대왕:146-165년)이 아니다. 이는 遂成 王으로 띄어읽기를 하지 않은 결과 일어난 오해이다. 또 이 왕은 동천왕(東川王)도 아니다. 왜냐하면 동천왕(東川王)은 東西南北殊에게 위나라의 관작인 "护寧東百殊"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천왕(東川王) 10년은 A.D 236년인데, 東西南北殊는 魏 明帝(226-239년)에 이어 그 다음 왕인 齊王 때 또 "护寧東百殊" 관작을 받았으므로, 그 관작을 받은 시기는 魏 明帝(226-239년)가 죽은 이후인 A.D 240년 이후가 된다. 이 때는 東川王 10년보다 4년 이상 후이다.

혹자는 위 문구를 수성왕(차대왕) 10년(155년)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차대왕 10년에 관아와 관리와 도읍을 현도, 비류에 두었다(司吏玄菟定邑都沸流)고 즉 천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 正史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차대왕 때 도읍을 현도로 옮긴 적이 없다. 관구검의 침범 때까지 고구려의 도성은 집안 방면에 있었다. 현도군은 원래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사기구인데 고구려가 범 아가리 속으로 고구려 수도를 밀어 넣었다는 것은 제정신으로는 할 소리가 아니다.

적대국의 군사기구가 있는 곳에 고구려의 수도를 둔다는 것은 전쟁에 져서 강요당하여 옮긴 경우 이외는 생각히기 어렵다. 동천왕 때 고구려가 위나라의 현도군이 있는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전쟁에 졌고, 또 고구려 지역의 지방 추장들이나 마힐도 승려들이 위나라에 귀부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긴 것일 것이다.

또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라고 적어 백제가 들어가 있다. 앞의 비문 중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 " 문구와 대비해 보면 백제는 오류이다. 이시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국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백수가 "护寧東百殊" 관작을 받은 것이나 고구려가 위나라에 사실상 굴복하여 도읍과 관리를 현도와 비류에 둔 것(司吏玄菟定邑都沸流)은 백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 일을 백제에서 "安久泰長歲禮樂"라고 적을 이유가 없다. 이는 백수 등이 공적을 자랑하기 위하여 과장한 문구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