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書의 取捨選擇 基準

 

간혹 인터넷 역사 홈에 적혀 있는 글을 읽어보면 역사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분 것 같은데 왜 이런 글을 쓸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그 글을 쓴 사람이 사서의 취사선택을 잘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래 글은 어떤 게시판에 있는 글인데 그 중 일부를 인용한다.

 

「두우가 통전에서 평양의 위치를 말했다. 요수에서 동남쪽으로 480리에 마자수인 압록수가 있고 다시 동남쪽으로 450리 지점에 평양성이 있다고 하였다. 또 요동에서 500리 떨어 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930리의 지역이 한 낙랑군과 현도군 땅이라고 하였다. 후한과 위에 이어 공손씨가 거주하였다. 공손연이 멸망하고, 서진 영가(307~312) 이후에 다시 고구려에 함몰되었다. 그 땅의 불내.둔유.대방.안시.평곽.안평.거취.문성현들은 모두 한 2군의 현들이다. 즉 조선.예맥.옥저의 땅이다. 위처럼 조선과 고구려를 정확하며 개략적으로 표현한 글은 아직 중국이나 한국에는 없다. 평양성을 이처럼 확신을 갖고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설명한 글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평양성임을 밝히는 글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근거도 약하다. 나는 이 평양성을 지금의 건평과 능원지역 부근으로 비정한다.」

 

위 글쓴이는 마자수와 평양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사서의 취사선택을 잘못하였기 때문에 마자수와 평양의 위치를 엉뚱하게 알고 있다.

통전 문구는 마자수(일명 압록수)와 평양 위치를 고의로 지명이동을 해 놓았기 때문에 통전 문구를 보고 마자수와 평양의 위치를 이해하면 엉뚱한 곳을 마자수 또는 평양으로 이해하게 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하여 通典 卷第186 邊防2 東夷下 高句麗條에 나오는 문구룰 살펴본다. "가"와 "나"는 본래 연결된 하나의 문장이지만 편의상 나누었다.

 

가.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又平壤城東北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至安市 小遼水源出遼山 西南流與大梁水會 大梁水在國西 出塞外 西南流注小遼水]

나.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入海 高麗之中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漢樂浪玄菟郡之地 自後漢及魏 為公孫氏所據 至淵滅 西晉永嘉以後 復陷入高麗 其不耐 屯有 帶方 安市平郭 安平 居就 文城皆漢二郡諸縣 則朝鮮濊貊沃沮之地]

 

위 "가" 부분을 살펴 본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又平壤城東北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至安市 小遼水源出遼山 西南流與大梁水會 大梁水在國西 出塞外 西南流注小遼水]

 

"가" 부분은 중국의 다른 정사 문구 내용과 대부분  동일하다. 이 문구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난하 방면의 갈석산으로 「夾右碣石入於河」로 지칭되는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산과는 다르다. 그리고 위 문구에 나오는 대요수는 요하를, 소요수는 혼하를, 대양수는 태자하 물줄기를 가리킨다. 고대에는 요하, 혼하, 태자하가 하류에서 만나서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요동 방면에 대한 설명이고, 요동 방면의 평양은 요양 방면이다. 그런데도 통전 저자는 평양성의 위치를 대동강 방면으로 지명이동하기 위하여 작심하고 대동강 평양 방면에 관한 문구인 파란색으로 적은 부분을 삽입하여 대동강 평양 방면으로 지명이동해 놓았다.

 

다음으로 "나" 부분을 살펴본다.

 

"나" 부분은 통전 저자가 작심하고 요하를 가리키는 마자수를 압록강으로 지명 이동해 놓은 것이다. 통전에 나오는 마자수가 어느 강인지 신당서와 한서지리지 문구를 살펴본다.

 

「고구려에 마자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색이 기러기 머리색이라서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돌아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 至安市 入于海」新唐書 高句麗傳

「서개마현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른다. 2개 군을 지나가는데 길이가 2천 1백 리이다. 西蓋馬 馬訾水 西北 入鹽難水 西南 至西安平 過郡二 行二千一百里」前漢書 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

 

위 문구에 의하면 마자수를 일명 압록수라고 불렀고, 이 마자수는 처음 서북으로 흐르다가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흐르며 길이가 2,100리이다. 압록수라 불리운 강 중에서 위 요건에 맞는 강은 동요하이다.

앞에 나온 통전 문구의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문구중 검은색 글자는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마자수 일명 압록수에 관한 문구인데, 통전 저자는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마자수 일명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으로 만들기 위하여이 [去遼東五百里] 문구를 살짝 집어넣고 [西安平] [安平]으로 변조하고, [高麗之中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문구를 집어 넣어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마자수 일명 압록수가 마치 압록강인 것처럼 지명 이동해 놓았다.

위 통전 문구에서 파란색 문구를 집어넣어 지명이동을 한 문구에 의하면 위 통전 문구에 나오는 평양성은 대동강 평양이 되나, 한나라 낙랑군, 현도군이 설치되고 공손씨가 도읍으로 사용한 곳은 요양의 평양 방면이다. 이곳은 뒤에 고구려 장수왕 등이 평양성으로 사용하였고,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곳이다.

마자수와 평양에 관한 통전 문구가 변조되어 있다는 것은 통전 이전에 지어진 한서지리지 문구와 그 후에 지어진 신당서 문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사서의 취사선택을 잘 하여야만 위 통전 문구가 변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간혹 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史書 그 중에서도 正史를 먼저 이해하고 차차 시대를 내려가면서 正史를 읽되 古記는 정사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보충적 사료로 사용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古記는 때로는 正史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으니 古記라고 하여 함부로 무시하지는 말고 古記 문구와 正史 문구가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펴보고 다른 정사 문구에서 그 시대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여 어떤 글이 더 신빙성이 더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중국의 사서를 읽어 보면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사서 내용이 변조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학도들이 이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사서를 동격에 두고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있어 후대에 만들어진 사서 문구를 가지고 그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정사 문구를 배척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길 수 있다.

韓.中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도들이 위에 말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만들어진 사서 문구를 읽고 혼란을 겪는 대표적 경우를 몇 가지 살펴본다.

먼저 秦開의 조선 침공과 그 후 燕 나라가 설치한 燕5郡의 위치가 어디인지 살펴본다.

 

B.C 281년 진개의 조선 침략 전 연 나라 영토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으며 국토는 사방 2천리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陀易水地 方二千餘里」 戰國策 燕策

 

B.C 281년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연 나라 領土(조선 침략으로 5군이 추가되었다.)

 

「그 뒤 연 나라의 명장 진개가 동호에 인질로 가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다음 연나라로 돌아오자 곧 동호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000리나 후퇴했다..중략..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여러 군을 두어 동호를 막았다.(B.C 281년) 당시 중국에는 문물.제도를 갖춘 전국이 7국이었는데, 그 중 3국(연,조,진)이 흉노와 경계를 맞대었다. 그 뒤 조나라 장군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 以拒胡 當是之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其後趙將李牧時 匈奴不敢入趙邊」史記 匈奴傳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방을 쳐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문번한으로 국경을 삼았다.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魏略 

「대부가 말하기를..중략..연나라는 갈석에 의하여 막히고, 사곡에 의하여 끊겼으며, 요수에 의하여 둘러싸였다..중략..이것들이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게 하니 山川은 나라의 보배이다. 大夫曰..중략..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중략..邦國之固 而山川社稷之寶也」 鹽鐵論 險固 [참고 : 전국책에서 蘇秦이 燕 文侯에게 말한 내용 중에 나오는 갈석은 연나라가 아직 조선 땅을 점령하기 전이고, 연나라 남쪽에 있는 갈석이므로, 황하 하구와 가까운 노북평원의 갈석을 지칭한 것이다.]

 

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하여 하나는 사기 흉노전에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어환이 지은 위략에 적혀 있다. 

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하여 사기 흉노전은 진개가 조선 땅 천리를 빼앗았다고 적혀 있고, 위략에는 2천리를 빼앗았다고 적혀 있다. 어느 사서가 그 일이 일어난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사서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사기이다.

그런데 진개의 조선 침략에 대하여 사마천이 지은 사기 흉노전 문구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마디로 무시하고 그보다 훨씬 후대에 지은 위략이라는 사서를 취신하는 어리석음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이는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그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사서, 그 중에서도 정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원칙을 집어 던져 버린 것이다. 중국의 정사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사서 내용이 바뀌는 경우가 흔히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그 사실이 일어난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정사를 보지 않고 후대에 만들어진 사서를 읽고 그것을 취신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진개의 조선 침략에 있어서 사기 흉노전 문구와 위략의 문구가 충돌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사건이 일어난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만들어진 사기 흉노전을 취신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개가 빼앗은 조선 땅은 2천리가 아니고 1천리로 봐야 한다.

漢郡縣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史記, 前漢書, 後漢書를 취신하지 않고 훨씬 후대 사서인 通典을 인용하므로서 엉뚱한 역사지식을 가지게 되거나, 燕5郡의 위치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사기 흉노전이나 조선전을 취신하지 않고 훨씬 후대 사서인 魏略을 취신하므로서 엉뚱한 역사지식을 가지게 된 분들은 사서의 취사선택 원칙만 제대로 지켰더라면 엉뚱한 역사지식을 갖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