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麗.唐의 중국동해안지방 전투

 

唐나라는 A.D 618년 李淵에 의하여 건국된 후 A.D 622년까지 중국대륙 접수에 나섭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건국 후 수년 내에 다 평정하였으나 고구려 무리가 진출한 중국동부지방 즉 지금의 山東省, 江蘇省 방면은 평정하는데 상당한 세월이 걸렸습니다.

앞에서 말하였지만 隋나라는 건국 초기인 開皇 초에 灤河 방면이나 大凌河 방면에 있던 郡들을 모두 폐지하거나 北京 서남 방면으로 후퇴시켰다가 開皇 3년에 폐지하였고, 大凌河 방면에 龍山縣 하나만 달랑 남겨두었습니다. 이것은 隋나라의 전 국력을 남쪽 陳 나라 정벌에 집중 투입하기 위한 것입니다.

高句麗 무리들은 그 틈을 타서 灤河 서쪽 발해연안 지역으로 스며들어 灤河와 渤海郡(북경 남쪽 방면) 사이에 邑落을 두고,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高句麗와 隋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隋 나라가 남쪽 陳 나라 정벌에 온 힘을 집중하기 위하여 동쪽에 있는 高句麗에 대하여 유화정책을 펴며 모르는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고구려 무리들이 스며든 곳은 隋帝가 고구려 정벌을 떠나면서 내린 詔書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그곳은 勃碣之間 즉 碣石山(난하 방면)에서 勃海郡(북경 남쪽 방면) 사이 지역입니다. 그후 隋나라가 남쪽 陳나라를 멸망시키자 이번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전에 북위 때의 영역인 대릉하 방면까지 다시 군현을 설치하려고 하나, 고구려는 수나라의 공격을 예감하고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비축하자 수나라는 營州總管 冲(위충)에게 遼西를 회복하게 하여 麗隋戰爭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영양왕 23년(A.D 612년) 봄 정월 임오 帝가 조서를 내렸다. "하찮은 고구려 무리들이 어리석고 불공하여 발해군(북경 남쪽 방면)과 갈석(난하 방면) 사이에 모여들고, 요(遼)와 예(濊)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 위 때 주륙을 거듭 당하여 그들의 소굴이 잠시 엎어졌어도, 난리로 막힘이 많자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어 지금은 지난 시대보다 더 많아졌다. 돌아보니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 땅이 되었다.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今 彼華壤 爲夷類

「평원왕(平原王) 32년(A.D 590년)에 왕은 陳나라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쌓아서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수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내려 "비록 藩國이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 또 말하였다 "그곳의 한 방면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 없으므로 결국 다시 관리를 뽑아 그곳에 가서 안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닦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어진 신하가 되는 것이니, 어찌 수고롭게 따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은 遼水의 넓이가 長江과 비교하여 어떠하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陳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짐이 만약 왕을 포용하고 기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이전의 잘못을 책망하려 한다면 한 장군에게 명하면 될 일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은근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려고 할 뿐이다." 왕은 조서를 받아 보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재위한 지 32년 겨울 10월에 죽었다. 왕호를 평원왕이라고 하였다.<이 때가 開皇 10년이었다. 隋書와 통감에는 '고조가 개황 17년(A.D 597년)에 조서를 내렸다.'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三十二年 王聞陳亡大懼 治兵積 爲拒守之策 隋高祖賜王璽書 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  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 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王得書惶恐 將奉表陳謝而未果 王在位三十二年 冬十月 薨 號曰平原王 是開皇十年 隋書及通鑑書 "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 誤也」

「영양왕 9년(A.D 598년) 왕이 말갈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범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쳐 물리쳤다. 수 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으로 원수를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여름 6월 帝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에 당도하자 장마비를 만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유행병이 돌았다. 주라후는 동래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달리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수의 군사가 돌아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또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요동분토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수 문제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창(昌 : 위덕왕)이 수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總管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   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諭以 '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런데 수나라 말 몇차례 고구려 정벌로 隋나라의 국력이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李淵은 A.D 617년 돌궐에 대한 방비를 담당하는 북방의 군사적 요충인 太原留守로 부임하였는데, 이때는 A.D 611년부터 일어난 농민반란이 차츰 규모가 커져 A.D 617년에는 長安과 洛陽 주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대부분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해 馬邑(지금 山西省 朔縣) 校尉로 있던 전 太原留守 劉武周가 수양제의 離宮인 汾陽宮(분양궁)을 점거하여 스스로 天子를 칭하고 국호를 楊이라 하고 山西까지 침범하였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李淵은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李世民과 晉陽令 劉文靜와 모의한 후  劉武周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한 후 그 해  7월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太原을 떠나 그해 11월 長安을 점령한 후 隋揚帝의 손자  楊侑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唐王이 되어 군림합니다. 이듬해 A.D 618년 5월 楊侑를 쫓아낸 다음  황제에 올라 국호를 唐, 연호를 武德이라 하고 長安에 도읍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李淵은 황제에 오른 A.D 618년에 옛 수나라 영역 전부를 차지했을가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唐書 등에는 당나라가 건국되자 말자 전지역에 군현을 설치한 것처럼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입니다. 隋나라 末에서 唐 初에는 薛擧, 薛仁皐), 劉武周, 王世充 등 할거세력유흑달(劉黑闥), 두건덕(竇建德) 등의 농민봉기군이 있었고, 당나라는 이들 군웅들을 A.D 622년 말경까지 거의 진압합니다.

이 무렵 중국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면서 각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朱粲의 楚(615~619년) 연호 昌達, 林士弘의 楚(617~622년) 연호 太平, 竇建德의 夏(617~621년) 연호 丁丑, 李密의 魏(617~618년) 연호 永平, 劉武周 楊(618~620년) 연호 天興, 梁師都의 梁(617~628년) 연호 永隆, 郭子和의 永樂王(617~618년) 연호 正平, 薛擧의 秦(617~618년) 연호 秦興, 蕭銑의 梁(618~621년)  연호 鳴鳳(鳳鳴), 宇文化及의 許(618~619년) 연호 天壽, 王世充의 鄭(619~621년) 연호 開明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세력이 薛擧(?~618년),  李密(582~618년), 宇文化及(583~619년), 두건덕(竇建德 ?~621년), 王世充(?~622년), 宇文化及(583-619년) 등입니다. 그 중 유력자 몇명의 면모와 근거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薛擧(?~618년), 薛仁皐(설인고) 부자는 감숙성 방면을 근거지로 한 세력으로, 大業 13년(617년)에 반란을 일으켜 秦帝를 칭했고, 唐 高祖 李淵이 長安을 점령하고 唐을 세우자 唐과 關中大戰을 벌이다가 A.D 618년에 薛擧가 병으로 죽고 그 아들 薛仁皐가 뒤를 이었으나 그 해 질척성에 들어가 항전하다가 이세민에게 패하여 죽었습니다.

李密(582~618년) 遼寧省朝陽 출신으로 楊玄感의 친구가 되었다가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망하여 적양(翟讓)의 군에 투항하여  후에 적양을 대신해서 그 집단을 장악한 후 李淵이 唐을 세웠을 때 최대 규모의 반란집단으로 부상하였으나, 洛陽의 王世充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하고, 기원 618년에 당에 항복하였습니다.

宇文化及(583~619년) 우문술의 장남으로 隋煬帝의 총애를 받아, 근위장이 되었다가 천하가 혼란해지자 동생 宇文智及과 함께 수양제를 목졸라 죽이고 수양제의 조카 양호(楊浩)를 황제로 추대하고 섭정으로써 모든 권력을 차지한 후  수나라의 옛 수도 洛陽으로 향했으나, 이미 洛陽에는 王世忠 등이 양동(楊侗)을 황제로 옹립하고 있다가 다른 반란세력인 李密에게 요청하여 宇文化及을 막게하자 李密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북상하여 자신이 세운   양호를 죽인 뒤 자신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許라 하고, 연호를 天壽라 하였다. 이듬해 619년에  다른 반란세력인 夏 두건덕(竇建德)에 패하여 뒤에 참수되었습니다.

劉武周(?~622년) 전 太原留守로 馬邑(지금 山西省 朔縣) 교위로 있다가 기원 617년 2월  隋煬帝의 離宮인 汾陽宮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산서성 북부 일대를 장악한 후 돌궐족의 지지를 받으며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국호를 楊이라 정하였으나,  李世民에게 수차 패한 후 620년 돌궐로 달아났습니다.

竇建德(573-621년)  河北省 출생으로 河北과 山東 지역을 장악한 후 A.D 617년에 夏나라를 세웠으나 621년에 李世民에 패하여  그해 7월 王世充과 함게 장안으로 압송되어 죽었습니다.

王世充(?~622년)  수양제 때 江都郡丞으로 임명되어 朱燮, 管崇, 孟讓등 군벌들을 집압하여 江都守로 승진하였다가 宇文化及이 수양제를 시해하자, 越王 동(侗)을 옹립하고 李密과 싸워 격파한 후 A.D 619년 4월 鄭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開明이라 하였습니다. 621년 이세민에게 패하여 항복하고 그해 7월 竇建德과 함게 장안으로 압송되어 기원 622년 장안에서 죽었습니다.

유흑달(劉黑闥(?~623년) 유흑달은 두건덕의 부장으로 있었는 사람으로 A.D 620년 7월 이세민과 두건충간에 일어난 호뇌전투에서 두건충이 패한뒤 잔여부대를 이끌며 항전하다가, 武德 4년(621년) 7월에 하북의 남부에서 재차 기병하여 그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그 해 12월 이세민과 이원길이 토벌부대를 이끌고 3개월에 걸친 토벌전을 펼쳐 승리하였으나 유흑달은 체포를 면하고 달아나 재기를 노렸으나 태자 이건성이 이끄는 군대의 진압과 위무(慰撫) 양면작전에 유흑달의 잔여부대는 대부분 당에 귀순하였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나라는 기원 618년에 개국하였지만 바로 중화를 통일하지 못하였고 무려 5년간이나 할거세력과 농민봉기군 평정에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런데 앞에 나온 할거세력 등의 거점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山東省 동부 방면과 江蘇省 방면에는 왜 농민봉기군이나 할거세력이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는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이곳은 수나라 말경 혼란기에 바로 고구려 무리들이 진출한 곳입니다.

그러나 三國史記나 唐書 모두 山東省 동부, 江蘇省 등 中國東海岸 지방에서 당나라가 고구려 무리가 진출한 사실이나 이를 평정한 사실은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렇지만 唐書에는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舊唐書와 新唐書에서 A.D 642년에 일어난 일을 살펴봅니다.

 

舊唐書

高祖 六年 春 二月辛亥 校獵於驪山

太宗 五年 十二月壬寅 幸溫湯 癸卯 獵於驪山

       十六年 十二月癸卯 幸溫湯 甲辰 狩於驪山 時陰寒晦冥 圍兵斷絕 上乘高望見之 欲捨其罰 恐虧軍令 乃回轡入谷以避之 是歲 高麗大臣蓋蘇文弒其君高武 而立武兄子藏為王

新唐書

高祖 六年 二月 劉黑闥伏誅 庚戌 幸溫湯 壬子 獵於 驪山 甲寅 至自溫湯

太宗 五年 十二月丁亥 詔:「決 死刑 京師五覆奏 諸州三覆奏 其日尚食毋進酒肉」壬寅 幸溫湯 癸卯 獵 於驪山 賜新豐高年帛 戊申 至自溫湯

       十六年 十二月癸卯 幸溫湯 甲辰 獵於驪山 乙己 至自溫湯

 

위 舊唐書나 新唐書의 정관 16년조 문구는 다음에 나오는 馬山大戰 전황을 요약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위 문구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요?

新唐書 문구는 舊唐書의 "時陰寒晦冥 圍兵斷絕 上乘高望見之 欲捨其罰 恐虧軍令 乃回轡入谷以避之 是歲 高麗大臣蓋蘇文弒其君高武 而立武兄子藏為王" 문구를 일부러 빼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빼 버린 문구 요지는 唐太宗이 驪山(고구려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군사들과 떨어지고 포위되어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니 군사들은 겁을 먹고 군령은 이지러졌기에 고삐를 돌려 계곡으로 들어가 피했다는 것과 그 때 高句麗 대신 淵蓋蘇文이 그 군주 高武를 시해하고 高武 형의 아들 藏을 왕으로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위 문구에 나오는 "獵"이나 "狩"은 사냥이라는 뜻이 아니고 자기 지역을 평정할 때 사용된 은유법 문구입니다. 그렇다면 위 문구에 왜 "獵"이나 "狩"이 나오고, 그 지역이 왜 "驪山(고구려산)"으로 적혀 있을까요? 또 唐書에 의도적으로 빼어버린 내용은 무엇일가요?

엣날에는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로 건너가는 길이 遼東에서 중국대륙으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습니다. 물길이 워낙 빨라 고대에는 큰 배가 없을 때 작은 배는 해류를 따라 빙 돌아서 遼東으로 갔습니다. 고구려는 隋나라 말 혼란기에 山東半島로 건너 山東省, 江蘇省 방면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위에 나오는 唐書 문구 하나 보고 고구려 무리가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로 건너갔다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으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 무리가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로 건너갔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唐나라 때 재상 杜宇가 지은 通典 문구를 살펴보겠습니다.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그 땅은 후한 때는 사방 2천리이다가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는 점차 좁아져 겨우 천여리이다가 수나라 때 이르러 점차 커져 동서 6천리가 되었다.] 通典卷 第一百八十六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고구려는 隋나라 때 이르러 동쪽으로는 별로 커진 것이 없습니다. 동쪽으로 조금 커졌다 해도 몇백리 더 커지지 않았습니다. 後漢 때 고구려 西邊을 單單大嶺(千山山脈 + 吉林合達嶺)으로 보면, 隋나라 때는 單單大嶺에서 서쪽으로 3-4천리 이상 뻗어나갔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땅 넓이가 東西로 6천리였다는 것은 隋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隋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또는 唐나라가 개국된 후 몇년간 상황을 보면, 河北省 방면은 竇建德(573-621년)이, 山西省 북쪽은 劉武周(?~622년)가, 그 북쪽은 東突厥이 각 장악하고 있어 고구려의 西邊을 아무리 서쪽으로 보아도 勃碣地域보다 더 서쪽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때의 勃碣地域을 고구려 西邊으로 본다고 하면 고구려는 東西로 4천리를 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東西 6천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가요?

唐나라 재상까지 지낸 杜宇가 한자를 몰라 通典을 엉터리로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는 고구려 무리가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를 건너 山東省 동부, 江蘇省 방면으로 뻗은 거리를 6천리로 본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고구려 무리가 山東半島로 건너가 山東省, 江蘇省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한 사실이 唐書에는 거의 적혀 있지 않고, 적혀 있는 것도 극히 일부만 그것도 무슨 암호를 쓰는 것처럼 은유법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무리가 山東半島를 건너 山東省 동부, 江蘇省 방면을 점령한 기간이 불과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唐나라 때 사서를 지으면서 고구려 무리가 山東省 등지로 진출한 사실을 일부러 빼고 적지 않았고, 또 三國史記를 지을 때도 中國王朝와 滿洲의 强國을 의식하여 筆禍를 입지 않기 위하여 백제나 고구려가 遼西나 中國東海岸 지방으로 진출한 사실을 적지 않고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隋나라 말경에 고구려 무리가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를 건너 山東省 동부, 江蘇省 방면으로 진출한 내용은 正史에는 나오지 않지만 중국의 향토지(鄕土志)에는 나옵니다.

먼저 중국의 江蘇省 宿遷市 자치정부에서 운영하는 嶂山森林公园 홈페이지 http://www.suqian.gov.cn/sqgk/syl02.htm를 보면 그곳에는 장산산림공원에 대한 연혁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고구려 淵盖蘇文이 당나라 장수 薛仁貴와 전쟁을 하여 연전연승 하였다는 古事가 나옵니다.

그 내용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 장수 설인귀가 싸운 유적지 소개와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藏军洞, 망을 보았다는 將臺, 찬밥을 먹었다는 冷飯臺,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였다는 清凉院에 대한 전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위 홈페이지는 sbs에서 淵蓋蘇文을 방영한 후 홈페이지 접속이 차단되었습니다.

 

在靈赭山南麓有藏軍洞相傳唐時高麗酋長蓋蘇文率兵入侵唐將屢戰屢敗匪寇遂深入腹地唐將薛仁貴領兵藏於洞中伺之寇至仁貴突然出擊將敵人兵馬斬獲殆盡此處附近尚有點將台冷飯台傳說點將台是薛仁貴出兵打仗前點將的高台;鍋框山是唐軍埋鍋煮飯的遺址;鏊子山是當地百姓給唐軍攤煎餅的地方;冷飯台是唐軍吃飯的地方當時供唐軍生活用水的水井有72口(現已發現6口其中1口較完整)園區北端交界處有一遺址名曰青墩據1963年《淮陰地區考古調查》介紹:青墩有一米多厚的漢文化層下面有一米厚的西周文化層面積約5000平方米在園區東北端交界處有一座西漢古城遺址古城北有清涼院相傳為唐代入侵者蓋蘇文紮營地古城西側曾於1996年出土一古棺棺內有頭盔護心鏡鐵劍銅茶壺等充分證明此處為古代兵家鏖戰之地當時供唐軍生活用水的水井有72口(現已發現6口其中1口較完整)영자산 남견에 장군동이라는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때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을 하여 싸웠으나 당나라 장수는 고구려에 싸우면 싸우는 대로 연전연패했다. 적은 내륙 깊숙히 들어왔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는 병사를 거느리고 이 동굴에 숨어서 적을 엿보고 있었다. 적이 다다르자 설인귀는 갑자기 출격을 하여 적병과 병마를 베고 빼앗아 위태롭게 했다. 이 부근에는 장대(將臺)와 냉반대(冷飯臺)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장대(將臺)는 설인귀가 출정전에 높은 대에 올라 장대를 세운데서 유래하며, 과광산은 당군이 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해 먹던 터를 말하며, 오자산(鏊子山)은 당시 백성들이 당군에게 솥을 걸어 놓고 전병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며, 냉반대는 당군이 밥을 먹던 곳이라 한다. 공원 북쪽 경계지역에 서한(西漢)의 옛성(古城) 유허지가 하나 있다. 고성 북쪽에는 청량원(清凉院)이 있는데 전하는 바에 당나라시대에 침입자 연개소문의 병사가 주둔하던 주둔지(영지)가 있다. 고성서쪽은 1996년에 출토된 고관(古棺)이 있는데 관 속에는 투구와 호심경, 철검, 동차호(구리 차 주전자)가 있어 이 곳이 고대에 병사들이 격전을 벌이던 곳이라는게 증명이 된다. 당시에 당나라 군사가 생활용수로 쓰던 우물이 72곳이 있는데, 현재 6개의 우물이 발견되었고 그 중의 하나는 정비가 끝났다.」

 

다음으로 唐 武德 3년(A.D 620년)에 일어난 朦朧塔에 대한 전설을 살펴봅니다.

청나라 때 간행된 阜寧縣志에 적혀 있는 朦朧塔(몽롱탑)에 관한 전설을 보면, 唐 武德 3년(A.D 620년)에 李世民이 군대를 거느리고 東征을 하던 중 지금의 江蘇省 염성시 건호현 소재 사양하와 서당하가 합쳐지는 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어느 달빛이 몽롱한 늦은 밤에 李世民이 단기필마로 적 진영을 염탐하기 위하여 적 진영에 다가가다가 조심하지 않아 진흙탕뻘에 다달았는데, 마침 적 진영을 순찰 중이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어 연개소문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자 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는데 말이 길을 잘 못드는 바람에 그만 진흙탕뻘에 빠지자 이세민은 말에서 뛰어 내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다 문득 한 개의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기니, 연개소문이 추격하여 우물있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우물 안에는 가지런한 거미줄이 걸려 있자 그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못하고 말을 돌려 군영으로 돌아가므로서 이세민이 간신히 살아났다는 것이다. 후에 이세민은 왕이 된 후 거미줄이 목숨을 살려준 은공을 잊지 못해 우물이 있던 곳에 하나의 탑을 세우고는 어둡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목슴을 건지게 되었다고 朦朧이라는 이름을 붙여 탑의 이름을 朦朧寶塔이라 지었댜. 탑을 세우고 淨慧寺라는 큰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탑의 동북방에 있는 洗泥河는 唐太宗이 말과 함께 진흙탕뻘에 빠지고 위험을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唐太宗李世民與蘇北朦朧寶塔唐太宗李世民的故事其中之一就是年長的人們一直盛傳的有關他與蘇北水鄉的一座千年古塔— —朦朧寶塔的傳說相傳李世民率師東征時曾抵達黃海之濱並駐紮於一片海灘上在一個明月皎潔的夜晚他夜巡大營卻信馬闖進敵陣恰巧碰上敵營主帥蓋蘇文所謂仇人相見分外眼紅蓋蘇文一眼認出是李世民便策馬揮刀來追李世民則急撥馬頭落荒而逃因慌不擇路不久就深陷淤泥河中說時遲那時快眼看有被蓋蘇文追上的危險李世民只得棄馬乘著月夜隻身奔逃危急中發現一口枯井便跳井藏身避禍可待蓋蘇文追到這口枯井時左尋右找卻不見李世民踪影低頭看看井口上分明結著一張厚厚而完整的蜘蛛網便料定井裡不會藏人於是策馬別去而李世民卻因此躲過了一劫後來做了皇帝的李世民始終沒有忘記這次歷險為感激蜘蛛結網的救命之恩他特派尉遲恭在這口枯井處建塔紀念由於李世民是個“真龍天子” 蜘蛛結網蒙住他也即“蒙龍” 因此這座塔就很自然地被呼為“蒙龍寶塔” 後來大約是誤傳誤寫“蒙龍”變成了“朦朧” 流傳至今朦朧寶塔隸屬於現江蘇省建湖縣寶塔鎮在鎮區的西北端」출처 [http://www.people.com.cn/GB/32306/33232/5763658.html]  [http://wachli.51.net/company/wachli/html/9jia006.htm]

 

 

다음으로 江蘇省 連雲港市 宿城에는 淵蓋蘇文과 唐太宗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城이 아니었으나, 연도불상에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연운항 지역에서 전투를 벌일 때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宿城을 쌓았다고 하며, 성 안에 있는 保駕山은 唐太宗이 패하여 숨은 곳이고, 唐王洞, 藏印石 등 지명은 이 전투로 인해 생긴 것이며, 蘇文頂은 淵蓋蘇文의 군사가 주둔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唐太宗賜名保駕山 : 保駕山座落於宿城西側的山谷中 山形獨特 峻秀 猶如一件渾然天成的巨型盆景 山頂有眾多天然岩洞和奇松怪石 傳說為唐王李世民收藏玉的藏印洞 射避追兵的唐王洞和薛仁貴救駕時的拴馬松等 宿城有座金字塔形的小山 名叫保駕山 山上有“唐王洞” “拴馬松” 唐王李世民晚年時 一日聞報朝鮮大將蓋蘇文越海侵犯大唐 唐軍先鋒張士貴的女婿胡宗憲敗其前鋒銳氣 正在乘勝進擊 請朝廷發兵增援。唐王懷疑:那蓋蘇文文武全才 萬夫莫敵 一犯中原時 把前去抵禦的張士貴翁婿打敗 幸虧朝鮮內亂 他回兵平亂 才解大唐之危。現在 他二犯中原 必定兵精將足 為何被張士貴翁婿戰勝?想是張士貴的營中出了能人 而被胡宗憲冒名頂功了。現在自己老了 早晚得讓位給兒子。當初一起創建大唐江山的一班大將 也老得不中用了 如就這樣讓位 實在無能人保兒子的江山 不如乘此御駕親征 訪個能人 以保江山 當下 唐王點兵出征. 兵至鬱州島五羊湖 唐王聽見前邊戰鼓咚咚 想看看哪員能將能打敗蓋蘇文 就隻身匹馬 到陣前察看 誰知他那龍袍玉帶金冠早被蓋蘇文望見了 放馬追過來 把他逼到湖邊的淤泥中 蓋蘇文的馬是寶駒 水和淤泥只能漫到腿彎 唐王的坐騎是匹普通馬 因此陷了下去 蓋蘇文將寶刀架在唐王脖子上 逼他咬破手指在龍袍上寫降書降表 否則絕不饒命! 正在這萬分危急之時 只見一個著白袍 騎白馬的小將衝了過來 那白馬是龍駒 水和淤泥只能漫過馬蹄 一陣風似的就到了面前 蓋蘇文一見白袍小將 嚇得領兵回頭往平山跑去 那小將要唐王兩腿夾緊馬肚 雙手抓緊伸過去的槍尖 輕輕一挑 連人帶馬就挑上了岸 唐王問那小將:“蓋蘇文怕你 是你打敗他的嗎?”那小將不敢回答 只望了一望唐王 就打馬往山北跑了 那小將是誰?正是唐王要訪的薛仁貴 他被張士貴欺矇 不敢見唐王 張士貴把他的戰功 都記在自己女婿的名下 指望女婿有功可升為先鋒 自己升為掌兵元帥 得個“天下無敵”的名號 以便圖謀唐朝江山 他怕薛仁貴說出真相 嚇唬說:“如果你對別人說只有你能打敗蓋蘇文 唐王知道後 就會傳你去殺頭” 唐王是個聰明絕頂的皇帝 當下看出事情的底細 下令全軍向北進發 一面追敵 一面訪賢 兵至兩山峽谷中 見山勢兀立 怪石嶙峋 巨石犬牙交錯 狀若虎口狼牙 軍士議論四起 怕中敵人埋伏之計 唐王聽了 策馬揮鞭鼓舞士氣說:“不入虎口 焉得賢臣良將?”後人就稱這山嶺叫“虎口嶺”了 下嶺已是黃昏 忽聽四下鼓號齊鳴 梆聲不絕 果真中了蓋蘇文的埋伏 唐王環顧四周 三面環山 一面臨海 形似簸箕 狀若口袋 正是虎腹險地 原來 蓋蘇文打不過薛仁貴 便布下了這個口袋陣來決戰 唐王臨危不懼 命令程咬金去叫那白袍小將前來退敵 唐王見有一座金字塔形的小山還沒被敵兵佔領 就上了山 命弓弩手向兩面山上一陣猛射 使得敵人不敢近前 唐王的兒子又命軍士在山北挑士築城 山城連營 請唐王進城避敵 那程咬金領命去尋找白袍小將 他在築城的軍士中穿梭了半夜也不見踪影 走得累了 就在山下的小橋上打盹 朦朧中 見白袍小將擦身而過 就跳起抱住后腰大叫大嚷:“你讓我找得好苦 快快跟我去見皇帝!”他平時就愛咋咋呼呼 嚇得薛仁貴以為是來找他去殺頭 猛將程咬金摔去丈把遠 脫身跑了 程咬金怕天明後回復不了王命 靈機一動 跑到營中對張士貴大發雷霆:“那白袍小將在你營中 為什麼不敢跟隨我去見皇帝?”張士貴指著女婿說:“就在眼前 你領去吧” 程咬金知道張士貴為人奸詐 便說:“好 我抱著他的腰 如他能將我摔出丈把遠 就認領 如不能 被我勒死了也活該!”程咬金雖老了 千斤猛力還在 他故意用這種方式去試真偽 程咬金走到張士貴女婿身後 猛地用力一抱 真的把個活人給勒死了 張士貴嚇得面如土色 乖乖地交出薛仁貴 讓他領去複命  這時 天已大明 山下的城剛好也築成了 程咬金領薛仁貴上山去拜見唐王 見唐王的馬拴在一棵如傘如蓋的松樹下 唐王坐在一個大岩洞中運籌退敵之策 唐王的兒子上前請唐王進城避敵 唐王感嘆地說:“自古以來 父不住子城 這次親征 意在尋得猛將 保你日後守穩大唐江山 現在猛將已得 正好出兵 怎能再進城避敵?這一宿之間 得一將一城 全賴這座扼敵的山啊!這山就叫'保駕山'吧!”薛仁貴一鼓作氣 消滅了殘敵 那保駕山 拴馬松 唐王洞 宿城 蓋蘇文據守的山頭“蘇文頂“等名稱 一直被世人稱到現在   출처 <朱文泉 搜集整理> : http://www.lygwh.gov.cn/show.asp?id=1995

 

山東省 即墨市 馬山에서는 貞觀 17년(A.D 643년)에 연개소문과 당태종 사이에 벌어진 馬山大戰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당태종이 정찰을 나갔다가 연개소문에게 발각되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가는데 연개소문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장수 김걸이 당태종을 구하고 사망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은 淸代의 肖英斋本 馬山志와 即墨鄕土志에 실려 있고, 마산에는 지금도 연개소문이 주둔하던 大王沟金杰 장군의 祠堂大王庙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馬山傳奇<青島新聞網2003-03-16 00:00:00>」「即墨馬山海拔233米是即墨西部平原上惟一的一座高山也是一個充滿了神奇的地方. 現在已知馬山最早的名稱出現於唐代似乎與“牛”有些關係名叫“牛脾山” 據說這是因為山形如“牛脾”的緣故. 後來山上還有過一座“牛王廟” 供奉著“牛王諸神” 現已僅存遺址. 明清時代此山又因雙峰隆起遠眺如“馬鞍”狀故又叫“馬鞍山” “高鞍山”. 今天所稱的馬山就是“馬鞍山”的簡稱. 馬山山脈主要是由“四峰一嶺一澗”組成. 東面主峰為馬山西面為大山東南為寶鞍山西南為團山西面的一條南北走向的山嶺為長嶺四峰間還有一條東西走向的寬闊深澗叫大王溝. 據清代肖英齋本《馬山志》和《即墨鄉土志》記載唐貞觀十七年643年)高麗國朝鮮)的大將蓋蘇文殺死了自己的君主自立為國君後便率領著大軍渡海侵犯即墨. 唐太宗得知後即親自統率部隊由登州和萊州方向迎擊來犯唐朝太宗曾屯兵於馬山的西南坡並率領著十餘騎乘著月色登山窺探敵營. 不料這一行動被蓋蘇文發覺即率領親兵追趕太宗於團山. 太宗不能脫身的消息報知龍驤將軍金傑後他提刀備馬夜上團山等到金傑的快馬來到馬山前坡的山澗時正遇上蓋蘇文. 只見金傑隔澗怒喝聲如轟雷炸頂迴盪在山谷. 不明真相的蓋蘇文見有援兵立刻收韁回馬放過了太宗悄然逃遁. 在第二天的“馬山大戰”中金將軍作戰非常英勇多次率先殺入敵陣抱旗追敵四十多里. 只因身上多處受傷壯烈殉國於馬山腳下.後人每每感念金傑將軍的英雄事蹟便將團山稱作是將軍峰. 到了元代朝廷又冊封金傑將軍為“忠勇王” 於是人們為了紀念他又將其當年斷喝蓋蘇文的這條山澗取名為“大王溝”. 據說明清時山上還曾修築過一座“大王廟” 另有一座碑碣上刻“金傑叱蓋蘇文處”字樣. 有關唐太宗發兵徵高麗的事在《舊唐書》裡還有記載. 馬山是一座有著奇特自然地貌的名山. 當地民諺道“嶗山高達不到馬山的半中腰” 說的就是馬山拔地而起的氣勢也說明馬山曾經經歷過巨大地殼運動的歷史滄桑. 約在1.3億年以前馬山一帶是一片茂密的亞熱帶森林和湖泊沼澤. 一些恐龍等史前大型動物也曾出沒其間. 也就是在這個時期發生了一次巨大的火山爆發使這裡的一切全部改變了模樣. 我們今天見到的“馬山石林” 就是這次火山爆發驟然冷凝後的壯觀景象. 六角形的柱狀節理一排排地冒出地面形成了二三十米高的“石林” 這其實才只是“石林”的“冰山一角”. 如果我們沿著“石林”的立面再向下挖究竟還有數十米還是上百米仍不得而知. 但僅僅是暴露於地表的這一部分就足以和英國的“巨人堤” 美國的“魔鬼塔”相媲美成為國家級自然保護區. 明代即墨縣令許鋌有詩讚美馬山說“墨右膠東未有山平崖突兀怡心顏憶昔秦皇逸六馬金鞍棄置岩崖下日久年深化作灰旁觀遠眺如雲堆. ”看來馬山在明代還被認為是秦始皇“馬放南山”的地方. 也許不可一世的秦始皇只顧東望蓬萊了而將他的金馬鞍一棄就是幾千年因此給我們留下了一座馬山. 事實上馬山還有許多歷史古蹟和未解之迷在等著我們去探究和認知. (明天請看“商河路爆炸案”)즉묵 마산은 해발 233미터이다. 즉묵의 서부 평원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산으로, 신기한 지형이 가득한 곳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마산이라는 명칭은 당나라 때 처음 나오고, 소와 관계가 있어 이름을 우비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근방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렇게 불린 연유는 산세가 마치 소의 비장과 같아서 라고 한다. 나중에 산의 윗면에 "우왕묘" 혹은 받들어 부르면 "우왕제신"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현재도 유적이 남아 있다. 명청시대에는 이 산의 쌍봉이 융기되어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말안장같이 보여 "마안산" "고안산"으로 불렸다. 지금은 마산으로 불리지만 마안산을 간단히 줄여 부르는 것이다. 마산산맥의 4개의 봉우리, 1개의 고개, 1개의 계곡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주봉은 마산이며, 서쪽은 대산, 동남쪽은 보안산이다. 서남은 단산이며 서쪽의 한 봉우리가 남북으로 달리는 고개를 장령이라 하며. 네 봉우리 간에는 동서로 된 넓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대왕구라 부른다. 청대의 초영제본에 실려 있는 마산지와 즉묵향토지 기사에 따르면 당나라 정관17년(643년) 고구려(조선)의 장수 연개소문이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군후(君后)가 되어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즉묵지방을 침범했다. 당태종이 이 사실을 안 후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를 거쳐 래주를 향해 침범해 오는 적을 맞이하였다. 당태종은 마산의 서남쪽의 고개에 주둔하고, 1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빛 아래 산에 올라 적 진영을 정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에게 발각되어 연개소문이 병사를 이끌고 단산에서 당태종을 추격했다. 당태종이 능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알게된 용양장군 김걸은 칼과 말을 준비하여 밤에 단산에 올랐다. 김걸이 빠른말을 타고 마산의 앞 고개의 산골짜기에 다달았을 때 정면에서 연개소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를 향해 노하여 고함지르니 그 소리가 마치 큰 우레와 같이 산정을 울리고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연개소문이 구원병이 있음을 보았는지는 진상이 분명치 않으나 말을 돌려 돌아가게되어 당태종은 풀려나게 되었으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도망갔다. 2일째 되던 날 마산대전 중 김걸장군의 작전이 매우 뛰어나 솔선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적을 죽이고 40여리나 적을 추격했으나,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고 마산 아래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후인들은 김걸장군의 영웅적인 사적을 듣고 감회에 젖었으며 단산을 장군봉으로  불렀다. 원대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김걸 장군을 충용왕으로 책봉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그를 기리게 되었다. 또한 당시 장군이 건너편의 연개소문을 꾸짖은 골짜기는 대왕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명.청시대에 증수.개축하여 산위에 1개의 사당을 만들었는데 대왕묘라고 하였다. 묘비에는 "김걸이 연개소문을 꾸짖은 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한 일은 구당서에 적혀 있다.」 [註 당서에는 정관 16년 12월조의 일로, 향토지에는 정관 17년의 일로 적혀 있으나 같은 사실을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山東省 蓬萊(지금의 등주)에는 貞觀 18년(A.D 644년)에 당태종과 연개소문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유래된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縣城 남쪽 苗山 아래 개울에 몸을 숨겼다가 날이 밝자 가마를 정비하고 서남쪽 강을 건너다 물에 빠진 후 투구와 갑옷을 말렸으며, 이 전투에서 唐太宗의 형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古城, 唐太宗 형의 사당인 大王庙, 식수가 모자라 판 우물인 一劍泉, 돌로 만든 물굽이 人馬灣, 唐太宗이 패하고 숨은 王溝村, 당태종의 가마가 빠진 落駕河, 투구와 갑옷을 말린 晒甲河 등 유적과 지명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唐太宗在蓬萊的傳說. 相傳唐貞觀十八年(AD 644年) 唐太宗李世民率尉遲敬德諸將御駕親征高麗?路經蓬萊南部山區一個村莊村民有幸遇見皇駕遂取名遇駕夼村當時高麗人蓋蘇文得聞太宗東征的消息後率兵前來阻擊百姓與唐軍一起在遇駕夼村東2 ?華里處的一個村莊護駕後稱這個村為護駕溝村隨後唐軍由此轉移到村里集南崮山頂駐紮與蓋軍在崮山腳下交戰蓋軍大敗逃到崮山北約15華里處安營扎寨休整兵馬並在營寨周圍築起土城牆後人們稱此地為古城后城東側的村莊稱古城東村;古城南側的村莊多是苗姓稱古城苗家村;古城西側的村莊多是李姓稱古城李家村唐太宗的哥哥為大王分兵馬駐紮在山腳下的村莊里列隊操練騎兵村中居民多為張姓後取村名站馬張家太宗之兄與蓋軍交戰陣亡太宗為之在站馬張家南修廟紀念名"大王廟" 一次唐太宗外出途經峰山南坡龍袍被棘子的彎鉤掛破了親兵揮刀欲將棘子砍掉他隨口說道:"不必了?此地棘子不準再長彎鉤就是了! " 後來這裡的棘子再也不長彎鉤了太宗駐紮在崮山頂上缺水他焦急萬分從腰間拔出寶劍朝一塊大青石奮力刺去劍沒入半尺一股泉水隨劍噴出從此水流不斷後人稱其為"一劍泉" 至今泉水流量不減一次太宗帶兵路過宋家村西山人困馬乏乾渴難忍太宗傳令休息他隨手拿過士兵手中長矛用力拋出長矛在不遠的地方插入土中頓時泉水湧出官兵大喜忙用青石擋成一米見方的水灣人馬暢飲後人取名"人馬灣" "人馬灣" 水至今不干返回時驕陽似火熱氣蒸人兵馬在老崔家溝村頭樹蔭下休息太宗剛剛坐穩就被刺娥刺了幾下他用手去摸手也被刺中疼得叫苦不迭氣憤地喊道:"該死的刺娥?呆在這里幹什麼!給我離村遠一點" 自此始老崔家溝村內村頭再也沒有刺娥了兵馬休息片刻啟程返營路過一個山坡太宗發現桑樹上結滿果實便隨手摘了幾個桑果嚐嚐又甜又香便封桑樹為百樹之王后來他又發現香椿味道鮮美比桑果強得多便改封香椿為百樹之王桑樹一氣之下氣崩"肚皮此後桑樹每長到成材之時"肚皮"就崩裂開太宗帶領全部兵馬下山北上在村里集北2華里處與蓋軍交戰蓋軍大敗?交戰之村後取名戰駕莊村太宗戰勝蓋軍後帶領兵馬進入龍山店鄉境內在龍山河處察看地形仰頭四處張望後此處幾個村莊分別稱東揚頭村西揚頭村後揚頭村接著他又向東進發行約數里時值正晌午時太宗降旨駐駕造飯用餐後此地兩村取名正晌村駐駕莊村太宗登上龍山安營扎寨一天他到民山東南的禿山上請來一位棋藝高超年過七旬的白鬍子老人陪他下棋二人從早下到晚太宗連輸十七盤老人為照顧皇帝面子最後特意輸掉一盤隨後老人飄然而去太宗為紀念這次棋賽御封此山為"十八盤" 一天太宗下山巡視行至黃泥川天色已黑迷失方向萬分焦急之際忽一人出現面前給太宗指明方向經查詢知是龍山大王太宗為感謝龍山大王便在龍山上修廟一座名"龍王廟" 太宗率軍離開龍山嚮東南方向進發於潮水鎮西南安營暫駐這里後稱上營村;另一部分兵馬在其東2華里處駐紮後稱中營村紮下營寨後計劃製造戰船?準備渡海東征造船需要精巧船工於是張榜求賢榜出之後數日無人揭榜太宗心中不快一日他無意中聽見禁軍議論一個外號叫"酒仙"的人會造船其父原是造船監工"酒仙"以能喝酒而得名家住縣城東60華里的一個小村子裡太宗聽罷決定親去拜訪他帶領人馬臂挽弓箭沿路一邊詢訪"酒仙"住處一邊打獵向東而去行至平暢河東不遠處一村莊時天降大雪在此詢訪"酒仙" 無人知曉此村後取名前大雪村再往東走不遠又見一村雪仍然不停這村取名後大雪村轉向南行又見一村這時雪小了這村取名小雪村再往前行又見一村此時雪過天晴進村詢訪"酒仙"住處仍無人知曉這村取名道(到)頭村太宗繼續前行這時天又下起大雪在茫茫大雪中忽發現路旁不遠臥著一隻梅花鹿太宗挽弓搭箭一箭射中傷鹿帶箭疾奔而去臥鹿之處後取名臥鹿村太宗驅馬追鹿雪越下越大當追到只有幾戶人家的一個山溝裡時傷鹿突然不見大宗在此尋鹿這裡就留下覓鹿夼這個村名太宗找不著鹿心中一時納悶他徑直向村邊的一所茅屋走去進屋見炕上躺著一位死去的老人牆上掛著一幅巨大的船圖太宗令人將圖揭下又發現老人枕下有一本黃皮大書翻開一看盡是各種造船圖形太宗大喜手捧所得"珍寶" 望著老人感嘆不已後知此人就是"酒仙" 太宗得到造船圖率軍離開龍山興致勃勃奔往縣城裡準備造船渡海當行至南王村東北約5?華里的一個村莊時,天色已晚,即住宿一夜,後這個村取名宿駕埠村。次日,行至離縣城不遠處,百姓得知太宗皇帝駕到紛紛前來摻駕因此留下遇駕溝摻駕疃兩個村名這時蓋蘇文得知太宗從此經過便在附近埋下伏兵攔截後此地村莊取名攔駕疃村當時正值夜晚風雨交加太宗戰敗倉皇逃到縣城南廟山腳下的溝夼裡躲藏起來後這裡取名王溝村天明後雨過天晴太宗整駕起程行至縣城西南渡河時皇駕忽然落入河中後來這裡取名落駕河起駕繼續東行於不遠的一條河邊上晾曬盔甲後來這裡取名曬甲河太宗進入縣城後大造船隻同時太宗沿海岸尋找渡口後聽取丞相魏徵的建議渡口選在城西欒家口時值深秋太宗兵馬從欒家口上船乘風破浪駛向遼東 당태종 봉래전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 정관18년(644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고구려를 치기 위해 봉래의 남쪽 산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행운이 있어 황제를 태운 가마를 볼 수 있었다. (마을 이름 : 가전촌)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태종의 동정(東征) 소식을 접한 후에 그를 막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왔다. 백성들과 당군은 가전촌 동쪽 2리되는 마을에서 황제의 가마를 호위하였다(마을 이름 : 호가구촌). 그 후 당군은 마을에 집결하여 남쪽 고산에 진을 치고 고산 아래에서 연개소문 군사와 싸웠다. 연개소문 군사들은 크게 패한 후 도망가 고산 북쪽 약 15 리쯤 되는 곳에 진을 치고 병마를 정비하고 더불어 병영의 주위에 흙으로 성과 담을 쌓았다. 후에 사람들은 그 성을 고성(古城)이라 했다.  후에 성의 동쪽 마을은 고성동촌으로, 남쪽은 묘씨(苗氏) 성들이 많이 살아 古城苗家村으로, 성의 서쪽은 이씨가 많아 古城李家村으로 불리어졌다. 당태종의 형이 있었는데 산 아래의 마을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는데 張氏 성이 많아 站馬張家라 불렸다. 당태종의 형은 연개소문의 병사들과 싸우다 죽었다. 당태종은 참마장가의 남쪽에 사당을 세우고 大王廟라 하고 그를 기렸다..중략..태종이 고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에 물이 없어 굉장히 초조해 하다가 허리에 찬 보검을 빼서 바위를 내려치니 칼이 반자나 들어갔고 갈라진 틈으로 칼을 타고 샘물이 솟았다. 물은 끊임없이 나왔고 후인들이 일검천이라 했으며 지금도 줄지 않고 나오고 있다. 한 번은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가촌 서산을 지나던 중 병마가 지치고 피곤하여 쉬도록 명한 뒤 창을 힘껏 던지니 긴 창이 멀지 않은 곳에 박혔는데, 그 때에 거기에서 샘물이 솟아나 관병이 기뻐하여 돌로 1 m 정도의 물굽이을 만들어 인마가 마시게 되니 人馬灣이라 했다..중략..태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와 북상하여 마을의 북쪽 2 리 되는 곳에서 연개소문의 병사와 싸웠는데 연개소문군이 대패하였다..중략..하루는 禿山에 올라 칠순의 백발노인과 바둑을 두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종은 17번을 내리 지다가 노인이 한판 더 두자하여 최후에 당태종이 이겼는데 노인이 홀연히 사라졌다. 당태종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산을 十八盤이라 했다. 또 하루는 태종이 산을 내려와 순시하던 중 누런진 흙개울에 이르렀는데 날은 어두운데 방향을 잃어 헤매이던 중 홀연히 한 사람이 나타나 길의 방향을 알려준 뒤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용산대왕이어서 태종이 그를 감사하기 위해서 용왕산의 사당을 하나 수리하여 용왕묘라 했다..중략..당태종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사람을 찾던 중 술 잘 먹는 酒仙을 알게 되어 그를 찾으러 가던 중 눈이 내렸다. 눈 오는 도중 한 마리의 꽃사슴이 있어 뒤쫓던 중 사슴은 잡지 못하고 사슴이 있던 곳에 초가집을 하나 발견하고 들어가게 되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죽어 있는 노인을 보게 되었고 벽에는 커다란 배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죽은 노인의 침대밑에서 누런 가죽으로 된 큰 책이 잇어 펼쳐보니 각종 배를 만드는 도형이 들어 있어 태종은 기뻐하며 진귀한 진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태종은 造船圖를 얻은 후에 병사를 거느리고 용산을 떠나 縣의 城에 이르러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였다. 그 때 남왕촌 동북 5 리의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날도 저물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宿駕埠村이라 했다. 다음 날 현의 성을 떠나 멀지 않은 곳에 행차를 하였는데 그 때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이 길을 지나갈 길을 미리 알고 부근에 가마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있었는데, 이 곳은 란가당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때는 밤이 깊고 바람과 비까지 더해져서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태종은 현의 성 남쪽 묘산의 아래의 개울에 몸을 숨겼다. 이 곳은 왕구촌이라 한다. 날이 밝아 비 갠 후에 태종은 가마를 정비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현의 서남쪽의 강을 건너다가 태종의 가마가 홀연히 물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 곳은 락가하라 한다. 가마를 세워 동쪽으로 가던 중 멀지 않은 강가에서 투구와 갑옷을 말렸는데 이 곳은 쇄갑하라 했다. 태종은 현의 성으로 들어가게 된 후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어 배를 댈 바닷가의 부두를 찾다가 승상 의징의 건의에 따라 부두를 가구(家口)를 선택했다. 때가 늦은 가을에 이르르매 태종은 병마를 배에 싣고 바람에 파도를 가르며 요동으로 향했다.」 출처 http://www.shandongok.com/web/sdgs/2003-10/1067065295.html

 

위의 전설들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무리는 隋나라가 멸망할 무렵 山東半島로 건너가 山東省, 江蘇省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점령하였습니다. [註 淸代의 肖英斋本 馬山志와 即墨鄕土志를 인용한 마산대전 전설에는 당나라 정관17년(643년)에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君后가 되어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즉묵지방을 침범하였고, 당태종이 이 사실을 안 후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를 거쳐 래주를 향해 침범해 오는 적을 맞이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청나라 때 간행된 阜寧縣志에 적혀 있는 朦朧塔에 관한 전설에는 이세민과 연개소문이 唐 武德 3년(A.D 620년)에 싸웠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한 시기는 수나라가 멸망할 무렵으로 보입니다.]

위에 나온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과 李世民은 唐 武德 3년(A.D 620년)부터 정관 18년(A.D 644년)까지 싸웠습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야 唐나라가 A. 618년에 건국된 후 A.D 624년에 中華를 통일한 후 A.D 630년에 東突厥을 복속시키고도 그로부터 몇년 내에 바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10여년 뒤인 A.D 645년이 되어서야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태도를 보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A.D 631년부터 A.D 647년까지 천리장성을 쌓고 당나라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고구려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할 때 공격하지 않고 천리장성을 거의 완성시켜 갈 때 공격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이 고구려가 당나라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나라가 A.D 645년에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A.D 643~644년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산동성 방면의 고구려 무리들을 몰아내자 바로 고구려 정벌 준비를 하여 A.D 645년 고구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당나라는 이미 그 전인 A.D 641년에 德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A.D 631년부터 시작된 천리장성 공사 때문에 고구려 조정이 장성 쌓는 것을 중지하고 당나라에 복속하자는 견해와 천리장성을 완성하여 당나라 침공을 방어하자는 견해로 갈라진 고구려 조정이 분열되어 있는 허실을 이미 탐지하여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고구려 침공이 승산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산동성 방면에 남은 고구려 군사를 몰아내자마자 바로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여 다음해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관 19년(A.D 645년)에 일어난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唐 武德 3년(A.D 620년)부터 계속된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은 A.D 645년에 일어난 麗唐戰爭 戰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가. 려수전쟁(麗隋戰爭)

1. 수나라의 중국통일   

 2. 요서의 군현변화  

3. 수나라의 요수전투 참패  

4. 살수대첩  

5. 수나라의 멸망

나.당전쟁(麗唐戰爭)

6. 건안성과 안시성 위치  

7. 중국동해안지방전투  

8. 안시성 싸움  

9. 안시성에서 철군  

10. 고구려의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