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서 중에는 고의로 지명 이동을 하여 지리지를 조작한 사서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唐書이다. 그 중에서 舊唐書보다 新唐書가 왜곡이 더욱 심하다. 그 한 예로 신당서 營州 柳城郡 조에는 柳城郡에 碣石山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이는 舊唐書나 通典 문구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잘못된 문구이다.
「營州柳城郡 上都督府 本遼西郡 萬歲通天元年 為契丹所陷 聖曆二年僑治漁陽 開元五年又還治柳城 天寶元年更名 土貢 : 人葠 麝香 豹尾 皮骨 縣一 有平盧軍 開元初置 東有鎮安軍 本燕郡守捉城 貞元二年為軍城 西四百八十里有渝關守捉城 又有汝羅 懷遠 巫閭 襄平 四守捉城 柳城 中 西北接奚 北接契丹 有東北鎮醫巫閭山祠 又東有碣石山」 新唐書 營州 柳城郡
당나라 재상 두우가 지은 通典에 의하면 柳城郡은 지금의 朝陽 방면이다.
「北平郡東至柳城郡七百里 南至海二百里 西至漁陽郡三百里 北至上洽口八十里 東南到臨榆關一百八十里 西南到馬城縣一百八十里 西北到石城縣一百四十里 東北到柳城郡七百里 去西京四千三百二十里 去東京三千五百二十里」[註 난하에서 조양 방면까지는 700리, 산해관 방면까지는 180-200리이다.]
「柳城郡東至遼河四百八十里 南至海二百六十里 西至北平郡七百里 北至契丹界五十里 東南到安東府二百七十里 西南到北平郡七百里 西北到契丹界七十里 東北到契丹界九十里 契丹衙帳四百里 去西京五千里 去東京四千一百十里」
「營州今理柳城縣 殷時為孤竹國地 漢徒河縣之青山 在郡城東百九十里 棘城即顓頊之墟 在郡城東南一百七十里 春秋時 地屬山戎 戰國時屬燕 秦并天下 屬遼西郡 二漢及晉皆因之慕容皝以柳城之北 龍山之南 所謂福德之地也 乃營制宮廟 改柳城為龍城 遂遷都龍城 號新宮曰和龍宮 皝時有黑龍白龍各一 鬥於龍山 皝率屬僚觀之 祭以太牢 二龍交首嬉戲 解角而去 皝大悅 號曰和龍宮 後燕慕容寶 北燕馮跋 相繼都之 至慕容雲 為馮跋所滅 至馮弘 為後魏所滅也 後魏置營 卅 後周武帝平齊 其地猶為高寶寧所據 隋文帝時討平寶寧 復以其地為營州 煬帝初州廢 置遼西郡大唐復為營州 或為柳城郡 領縣一 柳城有龍山 鮮卑山 在縣東南二百里 棘城之東塞外亦有鮮卑山 在遼西之北一百里 未詳孰是 青山 石門山 白狼山 白狼水 又有漢扶黎縣故城 在東南 其龍山 即慕容皝祭龍所也 有饒樂水 漢故徒河縣城 和龍城 室韋 靺鞨諸部並在東北 遠者六千里 近者二千餘里 西北與奚接 北與契丹相接」
柳城郡에 碣石山이 있다는 내용은 新唐書 이전에 만들어진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중국의 일부 사학자는 신당서 문구를 근거로 지금의 朝陽 방면에 碣石山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按《明一統志》謂碣石在昌黎縣北二十里 同治五年《昌黎縣志》引《永平府志》云:“山頂有石 卓立如柱 相傳為天橋柱 俗傳即碣石”《昌黎縣志》接著說:“然此石實不在山頂 由云峰之右稍上 道路崎嶇 人跡罕至 海道望之 不能見也 然山即仙臺頂之北面 而仙臺頂則正在此山之頂 實一山也 石柱在仙臺預之西北 仙臺實為一石而非累積所成 聳矗山頂百里望之瞭然可辨 則所謂大碣石 斷當屬之山巔之仙臺頂 而非山脊之天橋柱所能當 以其足為海道行舟遙望之標準 允協于‘夾右’之義也”《昌黎縣志》又云:“史言秦始皇刻石碣石今仙臺頂之下不遠 有二山對峙 其狀如門 未知真是否 然又言二世至碣石 悉刻始皇帝所立石 則始皇之銘 別立石刻之 如嶧山碑之例 非即封碣石之上(按《日知錄》謂始皇刻石之處見六 五處皆立石后刻 惟此處刻于碣石門上 不須另立石)他如漢武登之 名漢武臺;魏武登之 觀海賦詩;北魏文成帝愛之 改名樂游山;齊文宣登之 隋煬帝登之 賦詩;唐太宗登之 刻石紀功;實即仙臺頂之一山也” 這是把歷代帝王登臨的碣石確定在昌黎境內(按:齊文宣所登非此處碣石而是營州柳城之山 隋唐諸帝則未登碣石 并見下文)其次 另有兩處提到碣石 可列為三 四兩說」碣石考(劉起釪)
한국의 일부 在野史學者는 明一統志에 "갈석이 창려현 북 20리에 있다"는 문구를 잘못 이해하여, 이 昌黎縣을 大凌河 방면으로 보고, 大凌河 방면에 碣石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明一統志에 碣石의 위치와 관련되어 나오는 昌黎는 대릉하 방면이 아니라 난하 동쪽 방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昌黎縣志의 昌黎는 5代 이후 난하 동쪽 방면을 가리킨다. 新唐書 柳城郡 條에 柳城郡에 碣石山이 있었다는 문구는 다른 사서에 근거가 없다.
여담
- 史書에 나오는 碣石의 위치 -
사서에 나오는 碣石의 위치는 여러 곳이다. 따라서 碣石의 위치를 한곳으로만 알면 사서 해석에 착오가 일어나기 쉽다.
먼저 史記 原文이나 註釋에 나오는 碣石에 대하여 살펴본다.
1. [禹行自冀州始 冀州:既載 壺口 治梁及岐 既修太原 至於岳陽 覃懷致 功 至於衡漳 其土白壤 賦上上錯 田中中 常 詹既從 大陸既為 鳥夷皮服夾右碣石 □入於海] [注 集解鄭玄曰「鳥夷 東(北) [方] 之民(賦) [搏] 食鳥獸者]
위 문구에 의하면 고대에 島夷가 堯都로 갈 때 碣石을 우측으로 끼고 가서 黃河를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으로, 이 갈석은 황하 하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
2. [注□集解孔安國曰:「碣石海畔之山也」
공안국의 주석에 갈석은 바다 가에 있는 산이라고 하였다.
3. [注 索隱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蓋碣石山有二 此云「夾右碣石入於海」當是北平之碣石 색은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에 있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또 수경에 말하기를 요서군 임유현 남쪽 수중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북평군의) 갈석산은 2개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갈석을 끼고 바다에서 들어간다는 갈석은 북평군의 갈석이 아니다.]
위 문구를 보면 북평군에 갈석산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진장성이 시작되는 곳 즉 장성과 난하와 만나는 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난하하류에 있는 요서군 임유현 남쪽 수중에 있다. 또 황하하구에 있으니 위 문구에 나오는 갈석은 3군데가 된다.
4. [道九山:汧及岐至於荊山 踰於河;壺口 雷首 至於太岳;砥柱 析城至 於王屋; 太行 常山至於碣石 入於海;西傾 朱圉 鳥鼠 至於太華;熊耳 外方 桐柏至於負尾;道嶓□ 至於荊山;內方至於大別;□汶山之陽至衡山 □過九江 至於敷淺原] [注□正義播 布也 河至冀州 分佈為九河 下至滄州 更同合為一大河 名曰逆河 而夾右碣石入於渤海也]
위 문구에 의하면 고대에 황하가 하구에서 9줄기로 갈라져 구하가 되었다가 다시 합쳐 역하라 하였는데, 이곳은 우측으로 갈석을 끼고 발해에서 하구로 들어가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곳이다. 즉 협우갈석은 황하하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
이상은 史記卷二 夏本紀 第二 에서 인용.
5. [鄙 都鄙 謂近岳之邑 度邑 周書篇名 度音徒各反 正義括地誌云:「太行 恆山連延 東北接碣石 西北接岳山」言北望太行 恆山之邊鄙都邑也]
이 갈석은 태행산 동북의 갈석이므로, 태행산맥 산줄기를 말한다.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이나 난하 방면의 갈석이 아니다.
이상은 史記卷四 周本紀 第四에서 인용.
6. [三十二年 始皇之碣石 使燕人盧生求羨門 高誓 刻碣石門 壞城郭 決 通堤防]
이 갈석은 진시황이 간 갈석이다. 흔히 이 갈석에 대하여 난하하류 방면의 갈석이라고 하나, 진시황은 몇 번 황해 방면으로 갔지만 이는 불로사약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이 갈석은 고대에 황하하구 방면에 있었는 갈석이다.
7. [二世與趙高謀曰:「朕年少 初即位 黔首未集附 先帝巡行郡縣 以示強 威服 海內 今晏然不巡行 即見弱 毋以臣畜天下」春 二世東行郡縣李斯從 到碣石 並海 南至會稽 而盡刻始皇所立刻石 石旁著 大臣從者名 以章先帝成功盛德焉] [皇帝曰 :「金石刻盡始皇帝所為也 今襲號而金石刻辭不稱 始皇帝 其於久遠也 如後嗣為之者 不稱成功盛德」丞相臣斯 臣去疾 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請具刻詔書刻石 因明白矣 臣昧死請」制曰:「可」遂至遼東而還]
2세 황제가 간 갈석 역시 고대의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이다.
이상은 史記卷六 秦始皇本紀 第六에서 인용.
8. [注 集解皇覽曰:「項羽□在東郡谷城 東去縣十五里」正義括地誌云:「項羽 墓在濟州東阿縣東二十七里 谷城西三里 述征記項羽墓在谷城西北三里半許 毀壞 有碣石 項王之墓」
위 문구에서 항우 묘가 있는 곡성 서쪽에 있는 갈석은 산동성 방면의 갈석이다.
이상은 史記卷七 項羽本紀에서 인용.
9. [天子既已封禪泰山 無風雨菑 而方士更言蓬萊諸神山若將可得 於是上欣然庶幾 遇之 乃復東至海上望 冀遇蓬萊焉 奉車子侯暴病 一日死 上乃遂去 並海上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五月 返至甘泉 有司言寶鼎出為元鼎 以今年 為元封元年]
위 문구에 나오는 갈석은 효무제가 태산에서 동해로 가서 요서에서부터 북변을 돌아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난하하류 방면의 갈석인 것처럼 보이나, 태산에서 구원까지 가는 것이 4월 한달 사이에 일어났다. 이를 보면 위 문구에 나오는 갈석은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으로 보인다.
[夏四月癸卯 上還 登封泰山 降坐明堂 詔曰:「朕以眇身承至尊 兢兢焉 惟德菲薄 不明於禮樂 故用事八神 遭天地況施 著見景象 屑然如有聞震於 怪物 欲止不敢 遂登封泰山 至於梁父 然後升示亶肅然 自新 嘉與士大夫更 始 其以十月為元封元年 行所巡至 博 奉高 蛇丘 歷城 梁父 民田租逋賦 貸 已除 加年七十以上孤 寡帛 人二匹 四縣無出今年算 賜天下民爵一級 女子百戶牛 酒」行自泰山 復東巡海上 至碣石 自遼西曆北邊九原 歸於甘泉]
이상은 史記卷十二 孝武本紀에서 인용.
10. [注 正義言中國山及川東北流行 若南山首在崑崙蔥嶺 東北行 連隴山至南山 華山 渡河東北盡碣石山 黃河首起崑崙山;渭水 岷江發源出隴山:皆東北東入渤海]
이 갈석산도 고대의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이다.
이상은 史記卷二十七 天官書에서 인용,
11. [其明年 始皇復游海上 至琅邪 過恆山 從上黨歸 後三年 游 碣石 考入海方士 從上郡歸 後五年 始皇南至湘山 遂登會稽 並海上 冀遇海 中三神山之奇藥 不得 還至沙丘崩] [二世元年 東巡碣石 並海南 歷泰山 至會稽 皆禮祠之 而刻勒始皇所立石書 旁 以章始皇之功德 其秋 諸侯畔秦 三年而二世弒死]
앞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위 문구에서 진시황이나 2세황제가 간 갈석은 고대에 황하하류 방면의 갈석이다.
이상 史記卷二十八 封禪書에서 인용.
12. [注□集解瓚曰:「禹貢雲『夾石碣石入於海』然則河口之入海乃在碣石也]
위 문구에 의하면 갈석은 황하하구 방면에 있다. 하(河)는 황하를 가리킨다.
이상은 史記卷二十九 河渠書에서 인용.
13. [去游燕 歲余而後得見 說燕文侯 曰:「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六百乘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 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 栗矣 此所謂天府者也] [注 索隱(戰國策) 碣石山在常山九門縣 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縣西南]
위 문구에서 연나라 남쪽에 있는 갈석은 상산 구문현에 있다.
「大夫曰..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邦國之固 而山川社稷之寶也」 鹽鐵論 險固
위 문구에서 연나라 북쪽에 잇는 갈석은 특정산이 아니고 연장성 산줄기이다.
14. [冀州既載 壺口治梁及岐 既脩太原 至于嶽陽 覃懷底績 至于衡章 厥土惟白壤 厥賦上上錯 厥田中中 恆 衛既從 大陸既作 鳥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注 師古曰「碣石海邊山名也 言禹夾行此山之右而入于河逆上也]
[道 及岐至于荊山 逾于河 壺口 雷首 至于大嶽 ; 厎柱 析城 至于王屋 ; 太行 恆山 至于碣石入于海 西傾 朱圉 鳥鼠至于太華 熊耳 外方 桐柏至于倍尾 道嶓冢至于荊山 內方至于別 崏山之陽至于衡山 過九江至于敷淺原] [注師古曰 :「太行山在河內山陽西北 恆山在上曲陽西北 言二山連延 東北接碣石而入于海 行音胡郎反」 [注 臣瓚以為「禹貢『夾右碣石入于河』 則河入海乃在碣石也 武帝元光二年 河移徙東郡更注勃海 禹時不注也」
이 갈석은 고대의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이다.
이상 漢書卷二十八上 地理志 第八上에서 인용.
15. [史記趙武靈王出九門 如野臺以望齊中山之境碣石山 戰國策云在縣界] [遼西郡 陽樂 海陽 令支有孤竹城 肥如 臨渝] [山海經曰 :「碣石之山(綱){繩}水出焉 其上有玉 其下多青碧」水經曰在縣南 郭璞曰 :「或曰在右北平驪(城)[成]縣 海邊山也」
위 문구에 나오는 갈석은 요서군 임유현 방면 즉 난하하류 방면에 있는 갈석이다.
이상 後漢書 郡國志 遼西郡에서 인용
16. [又臣瓚注引禹貢曰 :「夾右碣石入於河 壺口 雷首入于海 則河入海乃在碣石也 武帝時 河移東郡 更注渤海 禹時不注渤海」 [島夷皮服海曲曰島 居島夷而衣其皮 夾右碣石入于河」碣石海邊山名 在今北平郡盧龍縣也 言禹夾行此山之右 入河逆上也]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 又有漢令支縣城 臨閭關今名臨榆關在縣城東一百八十里 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
위문구에 나오는 갈석은 난하하류 바다 속에 있다.
이상 通典卷第一百七十一州郡一 州郡序 序目上에서 인용.
17.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이상 通典卷第一百八十五 邊防一 邊防序 東夷上에서 인용.
18. 「營州柳城郡 上都督府 本遼西郡 萬歲通天元年 為契丹所陷 聖曆二年僑治漁陽 開元五年又還治柳城 天寶元年更名 土貢 : 人葠 麝香 豹尾 皮骨 縣一 有平盧軍 開元初置 東有鎮安軍 本燕郡守捉城 貞元二年為軍城 西四百八十里有渝關守捉城 又有汝羅 懷遠 巫閭 襄平 四守捉城 柳城 中 西北接奚 北接契丹 有東北鎮醫巫閭山祠 又東有碣石山」 新唐書 營州 柳城郡
위 갈석산은 고의로 왜곡한 것이거나 착오로 보인다.
19. 마지막으로 曹操가 간 碣石은 조조의 행적으로 보아 난하하류 방면의 바다 속에 있는 갈석으로 보인다. 曹操가 지은 시 "觀滄海" 첫 문구에 "東臨碣石"이 나오는데, 어떤이는 "갈석산에 올라"로 해석하고, 어떤이는 "갈석산에 임하여"로 해석한다. 바다 속에 있는 갈석을 내려다 보았다면 "동쪽에 있는 갈석산을 내려다 바라보니" 라는 뜻이 더 적합할 것이다.
만약 "동쪽으로 갈석산을 내려다 보니"로 해석하면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이 될 것이다. 난하하류나 황하하구 방면의 갈석 둘다 해당될 것 같은데, 행로로 보아 난하하류 쪽 갈석으로 보인다.
결어
사서에 나오는 碣石이나 갈석산은 만리장성 산줄기를 碣石이라 부른 경우, 고대의 황하하구 방면의 碣石山, 난하와 장성이 만나는 곳에 있는 碣石山, 난하하류 바다 속에 있는 碣石山이다. 또 만리장성 산줄기, 태행산맥 산줄기 등 산줄기를 碣石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 사서에 나오는 갈석은 전후 문구를 살펴보고 그 위치를 판단해야지 어느 한곳으로 고정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