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천황의 정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인덕천황(仁德天皇)은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아들이다. 인덕천황릉은 일본에 있는 역대 천황릉 중 가장 규모가  커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인덕천황(仁德天皇)이 태어난 해, 즉위한 해, 죽은해가 적혀 있지만 일본의 대부분 사학자들은 인덕천황(仁德天皇)이 태어난 해, 사망한 해가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믿지 않고 인덕천황이 태어난 해와 죽은 해를 모른다고 말할까? 이는 일본서기에 응신천황의 재위기간이 A.D 270년 2월 8일부터 310년 4월 1일까지로 적혀 있고, 그 아들로 적혀 있는 인덕천황의 재위기간이 A.D 313년 2월 15일부터 399년 2월 8일까지로 적혀 있지만,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실제 재위기간은 A.D 390년부터 399년까지이고, A.D 400년부터는 이중천황(履中天皇)이 즉위하였기 때문에 논리상으로 인덕천황은 천황으로 실제 재위한 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즉 논리상으로 인덕천황은 가공천황(架空天皇)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저자는 왜 인덕천황(仁德天皇)이라는 가공천황(架空天皇)을 만들어 일본서기에 적어 놓았을까?

이는 A.D 247년에 구주왜(九州倭) 왕조가 와해하고 A.D 390년에 대화지방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질 때까지 140 여년 동안의 천황공백기(天皇空白期)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때의 천황공백기에 대하여 살펴본다.

일본열도왜의 역사는 크게 나누어 B.C 2세기 초 이후 변한계(가야계) 무리들이 九州 등지로 이주하여 세운 소국(小國)들인 구주왜(九州倭) 역사와 같은 시기에 진한계(신라계) 무리들이 出雲, 但馬, 福井, 石川, 富土, 新潟 등 동해(東海)와 인접한 북륙지방(北1陸地方)으로 이주하여 세운 소국들인 신라계 소국들의 역사와 A.D 3세기 중반 이후 백제계 무리들이 本州의 중주지방(中州地方)으로 이주하여 세운 소국들인 대화왜(大和倭) 역사로 나눌 수 있다.

B.C 2세기 초 이후 일본열도로 이주한 무리들은 100여개의 소국(小國)들을 세웠는데, 이 소국들은 A.D 97-103년경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을 세웠다. 이 야마대연맹은 A.D 247년에 비미호(일본서기의 신공황후)가 죽은 후 일어난 내란으로 남왕국과 여왕국으로 갈라지면서 와해하였고, 여왕국은 태시초(A.D 266년)에 사신과 통역관을 보내어 공물을 받친 것을 마지막으로 구주왜의 대 중국왕조 외교활동은 중단되었다. 즉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 와해된 A.D 247년부터 응신천황(응신천황)이 실제 즉위한 A.D 390년 사이에 천황공백기(天皇空白期)가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는 A.D 247년 신공황후(神功皇后) 사망으로 구주왜(九州倭) 천황시대가 끝이 나고 A.D 390년에 대화지방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질 때까지 140 여년 동안의 천황공백기를 감추고 천황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대로 적지 않고 A.D 269년으로 늦추고,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즉위년도를 실제년도(A.D 390년)보다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꾸며 신공황후(神功皇后)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應神天皇) 즉위 사이에 천황공백기가 없었는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 결과 응신천황의 즉위시기를 2주갑 앞당기므로서 응신천황의 재위시기가 A.D 270년부터 응신이 죽은 A.D 399년까지 130년 동안 응신천황이 혼자서 다스린 것이 되어 사리에 맞지 않자 인덕천황이라는 가공천황을 하나 만들어 내어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재위기간은 A.D 270년부터 310년까지로 만들고, 인덕천황(仁德天皇)의 재위기간은 A.D 313년부터 399년년까지로 왜곡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본기(應神天皇本紀)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대비하면 응신천황(應神天皇) 원년은 A.D 390년이다.

 

 「응신천황(應神天皇) 3년( 실제 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을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註 온조백제)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은 아화(註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日本書紀

「응신천황(應神天皇) 8년(실제 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가야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신왕 6년(A.D 397년) 여름 5월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支)를 볼모로 보냈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支爲質」 三國史記 百濟本紀

 

응신천황의 실제 재위기간이 A.D 390년부터 399년까지이고,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A,D 400년 이후 인덕(仁德)의 아들인 이중천황(履中天皇) 등이 재위하였으므로, 인덕천황(仁德天皇)은 실제 재위한 적이 없는 가공천황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저자가 만들어 낸 가공천황 인덕(仁德)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덕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A.D 390년에 대화지방에 세워진 대화왕조의 천황공백기를 살펴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사이 천황공백기는 대화왕조의 천황공백기가 아니고 구주왜 왕조가 멸망하고 대화왜 왕조가 세워질 때까지 천황공백기이다. 그런데 A.D 400년부터 479년 사이에는 대화왕조의 천황공백기가 있었다.

A.D 399년 - 400년에 광개토왕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공격하는 왜(倭)를 추격하여 임나(대마도)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왜(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또 일본서기 응신천황본기 13년조와 22년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이때 고구려 군사는 담로도 방면으로 왔고, 本州의 北陸地方의 신라(길비국)는 응신조를 공격하여 항복받고 응신조로부터 6현을 할양받았다. 이 사실은 일본서기 응신천황본기 13년조와 22년조에 적혀 있으나, 응신조는 A.D 400년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은 A.D 400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또 광개토왕이 세운 임나연정왕(송서에는 왜왕으로 적혀 있다.)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표문에는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은 일본열도와 대마도, 한반도 남부지방을 복속 또는 평정하였다.

일본열도왜를 항복받은 광개토왕은 신라, 가야, 백제, 대마도, 구주왜, 대화왜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임나연정을 세우고 그 치소를 대마도에 두었다. 임나연정왕과는 별도로 대화왜 지방에는 광개토왕의 아들을 보내어 대화왜를 통치하게 하였는데, 이때 대화지방을 다스린 광개토왕의 아들 또는 그 손자는 아래와 같다.

 

  17세 이중천황(履中天皇) A.D 400년 3월 13일부터 405년 4월 30일까지 즉위 : 인덕의 아들

  18세 반정천황(反政天皇) A.D 406년 2월 6일부터 410년 2월 13일까지 즉위 : 인덕의 아들

  19세 윤공천황(允恭天皇) A.D 413년 1월 19일부터 453년 2월 9일까지 즉위 : 인덕의 아들

  20세 안강천황(安康天皇) A.D 454년 1월 29일부터 456년 9월 24일까지 즉위 : 윤공의 아들

  21세 웅략천황(雄略天皇) A.D 456년 12월 26일부터 479년 9월 9일까지 즉위 : 윤공의 제5자

 

즉 대화지방에 대화왜 천황시대가 A.D 39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A.D 400년에 응신조가 멸망하고 A.D 400년부터 광개토왕의 아들인 이중천황 등이 479년까지 대화지방을 통치하므로서 대화왜 천황시대의 공백기가 있자 광개토왕의 아들, 손자인 위 이중천황, 반정천황, 윤공천황, 안강천황, 웅략천황이 마치 대화왜 천황인 것처럼 왜곡하여 대화왜 천황공백기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위 천황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되는 광개토왕(談德)을 인덕(仁德)이라는 명칭으로 마치 응신천황의 아들인 것처럼 가공천황을 만들어 구주왜와 대화왜 사이의 천황공백기를 해결하고 또 대화왜 천황 사이의 공백기도 해결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덕(仁德)은 담덕(談德)의 다른 이름으로 광개토왕이다.

그렇다면 인덕(仁德)이 광개토왕이라면 어떻게 하여 대화지방에 거대한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이 존재 할 수 있을까? 설마 광개토왕의 무덤이 오사카 사카이 시에 있다는 말인가?

필자도 그 부분이 심히 의문이다. 일본서기를 보아도 인덕천황(仁德天皇)은 가공천황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하여 인덕천황릉이 존재할 수 있는지? 필자는 이 부분에 심히 의문을 품고 1992년 이래 수십번이나 인덕천황릉을 찾아가 주변의 전설, 대학의 자료 등을 찾아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궁내청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응신릉과 인덕릉에 관한 자료는 일부 공개된 것 이외는 철저히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일본의 이름있는 승려를 통하여 궁내청의 자료접근을 시도해 보았으나 일본인 승려조차 자료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현재 사카이 시에는 거대한 인덕천황릉이 있는데, 이는 담덕(인덕)의 아들인 이중천황(履中天皇), 윤공천황(允恭天皇), 안강천황(安康天皇) 중 누군가가 광개토왕이 죽은 후 관이 없는 거대한 릉을 만들고 인덕릉(仁德陵)이라 부르며 담덕을 제사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신공황후(神功皇后), 응신천황(應神天皇), 이중천황(履中天皇)은 각 서로 다른 혈통인데도 응신천황(應神天皇)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아들로, 인덕천항을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아들로 각 조작하여 구주왜 천황, 대화왜 응신천황, 광개토왕의 아들, 손자인 이중천황(履中天皇) 등이 동일한 혈통인 것으로 왜곡하여 천황가(天皇家)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위장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