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 5王의 正體

 

중국의 사서인 宋書, 南齊書, 南史 등에 나오는 讚, 珍, 濟, 興, 武 5왕을 왜5왕이라 부른다. 이 왜5왕은  九州倭나 大和倭와는 다른 倭王이다. 왜5왕이 나타나는 시기는 廣開土王이 日本을 討伐한 永樂10년 이후부터 任那聯政이 멸망한 A.D 479년 사이에 나타나므로, 倭5王은 廣開土王이 세운 任那聯政의 王으로 보인다.

古記에 의하면 廣開土王은 정복 또는 복속시킨 新羅, 百濟, 加耶, 對馬島, 日本列島 倭를 통제하기 위하여 10국 연립의 任那聯政을 세우고 그 治所를 任那(대마도)에 두었다. 이 任那聯政은 A.D 479년까지 존속하였는데, 왜5왕은 東晋, 宋, 南齊 등에 사신을 보내고, 官爵을 除授받았다.

왜5왕이 중국왕조에 사신을 보낸 연도와 관작을 제수받은 연도를 살펴본다.

 

초대왕 찬(讚)

 

-진 안제(396-418년) 때 왜왕 찬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晉安帝時有倭王讚遣使朝貢).(南史)

-고조 영초 2년(421년) 찬이 조공하였다. (高祖永初二年詔曰倭讚萬里修貢遠誠宜甄 可賜除授).(宋書)

-태조 원가 2년(425년) 찬이 다시 사마 조달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太祖元嘉二年讚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宋書)

 

2대왕 진(珍)

 

- 찬이 죽고 동생 진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다.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하고왜수 등 13人에게도 평서, 정로, 관군, 보국 등의 장군을 제수 주기를 청하여 들어주었다(讚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聽). 宋書

 

3대왕 제(濟)

 

- 원가 20년(A.D 443년)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하였다. (元嘉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宋書

- 원가 28년(A.D 451년)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로 삼고 안동장군은 옛날과 같다. 23명도 함께 군군에 제수하였다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宋書

 

4대왕 흥(興)

 

- 제(濟)가 죽자 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濟死世子興遣使貢獻). 宋書

- 세조 대명 6년(462년) 왜(倭) 왕세자 흥에게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하였다.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藩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 宋書

 

5대왕 무(武)

 

- 흥(興)이 죽고 아우 무(武)가 서자 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다. (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

- 승명 2년(478년) 무(武)에게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였다. (順帝昇明二年遣使上表曰..中略..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宋書

- 건원 원년(479년) 새로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고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南齊書

- 남제 건원중(479-482)에 무(武)에게 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하였다.(齊建元中除武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鎭東大將軍). 南史

- 양 무제.즉위년에 무(武)에게 정동대장군을 제수하였다.(梁武帝卽位進武號征東大將軍). 南史

 

倭五王이 받은 품계를 보면 3품인 安東將軍에서 2품인 安東大將軍 또는 鎭東大將軍" 순서로 품계가 올라갔다. 

 

倭五王이 주장한 영역

 

宋書 倭傳 등 문구를 보면 왜5왕 중 珍은 자칭 六國諸軍事라고 주장하였고 武는 자칭 七國諸軍事라고 주장하였다.

倭五王이 주장한 영역은 倭, 百濟, 新羅, 任那(對馬島), 加羅, 秦韓(辰韓), 慕韓(馬韓)이다. 즉 왜5왕이 주장한 영역은 한반도 남부, 대마도, 일본열도이다. 특이한 점은 백제 지역을 백제와 모한(마한)으로, 신라 지역을 신라와 진한으로 각 분리하여 부른 것이다.

왜5왕이 나타날 무렵은 溫祚百濟와 馬韓聯盟 지역이 모두 仇台百濟에 정벌되어 온조백제 지역은 侯國으로, 마한연맹 지역은 담로를 보내어 통치할 무렵인데, 倭5王은 仇台百濟가 溫祚百濟와 馬韓을 병합한 사실, 新羅가 신라 주변 小國들을 병합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任那聯政을 세운 高句麗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으로, 高句麗는 정복지를 통제함에 있어 新羅 지역을 신라와 신라 주변지역으로 분리하고, 百濟 지역을 온조백제 지역과 마한 지역으로 분리하여 신라와 백제를 통제하려 한 의도가 들어난 것이다.

任那聯政이 설치된 후 新羅 지역은 A.D 417년에 그 전인 A.D 402년 3월에 倭國(대마도 임나연정)에 인질로 보낸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과 A.D 412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왜국과 고구려로부터 각 돌려받은 후 신라에 대한 倭(임나연정)의 공격이 심해진 것으로 보아, A.D 417년 이후는 新羅가 高句麗나 任那聯政에 복속하지 않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百濟는 애초부터 임나연정에 복속하지 않았고, 永樂 14년에 倭(일본열도왜와 구태백제)는 고구려의 帶方界를 공격하였다. 따라서 倭5王 시기 任那聯政의 세력권은 A.D 479년경까지 한반도 加耶 지역, 對馬島, 一岐島, 九州 등지에만 미쳤고, 大和倭는 웅략천황 무렵에 任那聯政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宋書 倭傳에는 倭王 武가 任那聯政의 영역으로 "동쪽으로 毛人 55개국을, 서쪽으로 66개국을, 북쪽으로 95개국을 복속시켰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영역은 한반도 남부지방인 新羅, 加耶, 百濟와 對馬島 및 日本列島가 되나, 倭王 武 무렵은 加耶, 對馬島, 九州 정도만 임나연정의 세력권에 속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임나연정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후이다. 따라서 倭王 武의 주장은 옛날에 廣開土王이 정벌 또는 복속시켰을 때의 일을 마치 倭王 武 자신이 한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倭5王은 왜 六國諸軍事 또는 七國諸軍事라고 주장하였는가?

 

고구려는 A.D 392년 정월에 사신을 新羅에 보내어 武力을 배경으로 實聖을 人質로 받아 新羅를 복속시켰고, 같은해 10월에 溫祚百濟를 항복받았으며, A.D 396년에는 仇台百濟 수도 등지를 점령하고 溫祚百濟를 다시 항복받고, 百濟로부터 加耶 지역을 빼앗았으며, A.D 400년에는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를 항복받고 倭를 추격하여 任那(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日本列島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위와 같이 新羅, 百濟, 加耶, 對馬島, 日本列島倭를 복속시킨 廣開土王은 복속지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10國으로 任那聯政을 만들어 그 治所를 백제와 倭 사이 해상통로의 要地인 對馬島에 두고 임나연정왕이 관장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임나연정왕은 광개토왕이 복속시킨 복속지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六國諸軍事 또는 七國諸軍事를칭한 것으로 보인다.

 

倭五王과 日本書紀의 天皇은 동일인물인가?

 

일부 사학자는 倭五王과 일본서기의 天皇이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일인물이 아니다. 日本書紀에는 天皇이 宋이나 南齊에 사신을 보낸 내용이나, 관작을 제수받은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또 武가 宋에 보낸 國書에 "동쪽으로 毛人 55국을 치고, 서쪽으로 66국을 복속시키고, 북쪽으로 95국을 평정하였다(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고 주장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雄略天皇本紀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武가 宋에 보낸 國書에는 武가 일본열도를 정벌하였다고 적혀 있고, 雄略天皇本紀에는 任那(대마도)에 주둔한 日本府의 장군들이 任那王의 지시를 받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任那王이 日本府의 장군보다 上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倭5王은 日本書紀의 天皇이 아니고 任那聯政王이다

 

「웅략천황(雄略天皇) 8년 봄 2월 전략. 신라왕은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가무하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 온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임나왕에게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 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는 매달려 있는 깃발과 같다. 나라의 위태로움은 누란의 위기보다 더하다. 명의 장단도 헤아릴 수 없다. 엎디어 일본부의 장군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임나왕은 선신(膳臣),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 난파길토역목자(難波吉土赤目子) 등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도와주게 하였다. 八年春二月...於是 新羅王 夜聞高麗軍四面歌舞 知賊盡入新羅也 乃使人於任那王曰 高麗王征伐我國 當此之時 若綴旒然 國之危殆 過於累卵 命之脩短 太所不計 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由是 任那王勸膳臣斑鳩(斑鳩此云伊柯屢我)吉備臣小梨 難波吉土赤目子 往救新羅」

 

이 임나연정은 雄略天皇 23년(A.D 479년)에 고구려 수군에 패하여 와해되었다. 일본서기에는 筑紫(구주)의 安致臣, 馬飼臣 등이 水軍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배하였다고 적혀 있다..

 

「雄略天皇 23년(A.D 479년) 여름 4월 이 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 마사신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가을 7월 천황의 병이 몹시 심하여 조(詔)하여 상벌제도,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황태자에 맡겼다. 夏四月...是歳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撃高麗 秋七月辛丑朔 天皇寢疾不預 詔賞罰支度 事無巨細 並付皇太子.」

 

宋書에 의하면 이때 고구려 水軍과 싸운 주역이 倭王 武로 적혀 있다. 따라서 축자의 安致臣 등은 任那聯政王 武의 지휘 아래 고구려 水軍과 싸웠는 것으로 보이고, 이때 축자의 안치신 등이 任那聯政王 武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九州倭가 任那聯政에 복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任那聯政은 이 전쟁에 패배한 후 와해되었고, 이후 加耶, 任那倭, 九州倭, 大和倭는 각 독립세력이 되었다.

그 뒤 A.D 502년에 任那의 武는 梁 나라로부터 征東將軍 관작을 받았다. 武는 任那聯政의 마지막 왕이므로, 梁書 문구를 언뜻 보면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武가 A.D 502년에 양나라로부터 征東將軍이라는 관작을 받은 것은 任那聯政이 A.D 502년까지 존속했기 때문이 아니고,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 A.D 487년에는 對馬島가, A.D 488년에는 일본열도가 백제에 평정당하였고, 仁賢天皇이 즉위하였는데, 그 후 A.D 501년에 일어난 백제왕실의 내분으로 백제가 對馬島를 돌볼 틈이 없자 武가 그 틈을 타서 A.D 502년에 梁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征東將軍 관작을 받은 것으로, 任那聯政이 그때까지 존속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