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歷史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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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2005년 4월 11일 공사창립 30주년기념 특별전시회에 동천왕 시대 벽비(壁碑)를 전시한 적이 있다. 이 벽비(壁碑)는 가로 세로 30㎝, 두께5㎝ 크기에 점토판에 글씨를 새기고 구리(銅) 가루를 넣고 구운 것으로 290여자가 새겨져 있다. 이 벽비는 1930년대에 평양에서 출토되어 한 집안에서 대대로 소장해온 것이라 전하며, 귀퉁이 일부가 깨지고 상당수 글자는 불분명하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일부 글자는 불분명하여 다른 글자로 보는 이도 있다.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 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 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繼明帝 還(逐)(多)護(寧)東百殊 司吏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以?)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 永傳百世存祖. 위 명제 청룡 계축년으로부터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왕은 현현궁 삼태읍장에게 명하여 보기 200과 魏나라로 가게 하였다. (후에) 도성으로 돌아와 삼가 분부하신 광대한 계책대로 하였다고 복명하였다..중략..짐승들이 이상한 징후를 보이며 시조 사당 전실에 떨어져 죽자 백수는 의식을 멈추었다. (백수는) 明帝에 이어 (齊王 때도) "逐多護寧東百殊"가 되어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를 두니, 평안하고 태평하며 예악이 있는 세월이 고구려에 이어젔다. 殊는 天府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고,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레 보살피려 하였다. 위나암성으로 가서 흘계를 (보내어) 3천국 졸본읍도를 만들 게 하고,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지냈다. 이를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린다. 나라를 회복하고 도읍을 다시 만드는 기쁨을 천부궁에서 日月神을 참배하여 알리고 天神地祗에게 제사지냈다. 무리들이 邑長, 百長, 國殊 등과 정성을 다하여 벽비(壁碑)를 세우니 (고구려는) 백세토록 영원히 이어지고 始祖는 영원하리라.」[註:계축년은 명제 청룡 원년으로 A.D 233년이고, 동천왕 11년은 A.D 237년이다. 이로 보아 청룡계축 뒤에 나오는 "二"는 "五"인데, 일부 획이 희미해져 "二"로 보인 것이다. 그리고 慾殺鎩는 잘못 새긴 것이다.]
박물관측은 전문가 20여명에 자문을 받아본 후 진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이 벽비(壁碑)에 대하여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가치를 판단하기 이전에 진위 판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한국 고대사 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유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 벽비(壁碑) 서두에 나오는 "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 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 위 명제 청룡 5년이고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왕은 현현궁에서 삼태읍장에게 명하여 보기 200과 위나라로 가게 하였다. (후에) 도성으로 돌아와 삼가 분부하신 광대한 계책대로 하였다고 복명하였다." 문구는 고구려와 위나라간의 외교관계에 관한 것이댜.
이 무렵 고구려와 위나라는 어떤 외교관계를 가졌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천왕 8년(234년)에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보아 위나라와 고구려는 234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고구려는 237년에 위나라에 또 사신을 보냈다.
위 벽비 문구 중 의미가 있는 것은 앞 부분에 나오는 외교에 관한 부분과 뒷 부분에 나오는 백수 등의 공적에 관한 부분이다.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繼 明帝還(逐)(多)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永 傳百世存祖].
위 벽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1. 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위 벽비 문구에는 위 명제라고 적혀 있고 그 뒤에 동천왕이 동주(東主)로 나온다. 동주는 동쪽의 왕이라는 뜻이다. 동주는 의미상으로 위나라 명제보다 격이 낮다. 이 벽비는 고구려보다 위나라를 상국(上國)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벽비를 만든 사람은 위나라로부터 관작을 받은 고구려 지방 추장 또는 수(殊) 직위를 가진 마힐도 승려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실의 공식입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짐승들이 이상한 징후를 보이며 시조 사당 전실에 떨어져 죽자 백수는 의식을 멈추었다.
위 문구를 보면 당시 백수(마힐도 승려 중 가장 높은 자)가 시조 사당을 관장하고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문구는 나라에 국난이 생길 것을 예언하는 문구로, 벽비에는 이러한 현상이 언제 일어났는지 적혀 있지 않지만 관구검의 침범 전으로 추정된다.
3. 繼明帝還(逐)(多)護(寧)東百殊 司吏邑都沸流 安泰久歲禮樂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存其故都 將不耐城
(백수는) 명제에 이어 (제왕 때도) "逐多護寧東百殊"가 되어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沸流)에 두니 고구려는 평안하고 태평하며 예악이 있는 세월이 되었다. 수(殊)가 천부(天府)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고,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레 보살피려 하였다.
위 문구를 보면 백수는 위나라로부터 "逐多護(寧)東百殊" 관작을 받았다. 이때 비류에 관아, 관리, 도읍이 있었다. 수(殊)가 천부(天府)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고,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례 보살피려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 무렵 동천왕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4.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國卒本邑都 以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 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 永傳百世存祖
위나암성으로 가서 흘계를 (보내어) 3천국 졸본읍도를 만들 게 하고,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지냈다. 이를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린다. 나라를 회복하고 도읍을 다시 만드는 기쁨을 천부궁에서 일월신(日月神:해와 달 즉 천제를 지칭. 고구려왕은 해와 달의 아들이라 칭했다.)을 배알하고 천신지지에게 제사지냈다. 읍장, 백장, 국수 등이 정성을 다하여 벽비를 세우니 (고구려는) 백세토록 영원히 이어지고 시조는 영원하리라.
백수가 위나암상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卒本邑都)를 만드는 것을 계속하고,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지내고, 나라를 회복하고 도읍을 다시 만드는 기쁨을 천부궁에서 일월신을 참배하여 알리고 천신지지에게 제사지낸 것을 보면 동천왕이 할 일을 백수가 거의 대신하고 있다. 이 벽비의 중심 인물인 백수는 그 뒤 고구려가 위나라 세력권에서 벗어낫을 때 도망갔거나 아니면 처형되었을 것이다.
위 문구 역시 관구검 침범 이후 사실을 적은 것이다.
5. 峴睍宮, 摩詰道
위 벽비에 현현궁, 마힐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실이 공식적으로 대승불교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민간에 유마힐도가 전파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나라는 고구려를 점령한 후 고구려를 통치하기 위하여 고구려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마힐도 승려나 지방 추장들에게 읍장, 백장 관작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수(殊)나 지방 추장들이 모두 위나라에 복속한 것은 아닐 것이다.
6. 殊
"四十六殊" "百殊" "殊" "國殊" 등 문구가 나오는데, 수(殊)는 마힐도 승려의 관장지역을 나타내는 직위로 추정된다.
7. 邑長, 百長
고구려 관작에 읍장, 백장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중국군현의 하급관리로 읍군(邑君), 읍장(邑長), 백장(百長) 등이 보이는데, 이는 중국왕조가 설치한 군현지역의 토착거수 또는 중국왕조가 변방국의 토착거수들을 포섭하여 내려준 작위이다. 위 벽비에 나오는 읍장, 백장은 위나라로부터 읍군, 읍장, 백장 관작을 받은 고구려 지역의 마힐도 승려나 지방 추장들로 보이는데, 이들은 위나라로부터 읍장, 백장 관작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를 벽비 등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관작은 고구려 관작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나암성(尉那巖城) 등 위나라의 군현지역이 아닌 고구려 지역에서 읍군, 읍장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동천왕 때 관구검 침범 이전이나 이후 고구려때 일부 수(殊)나 지방 추장들은 위나라로부터 읍장, 백장 등의 관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위나라 군사가 위나암성 등지를 점령한 해는 246년이므로, 위 벽비는 246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8. 拜謁日月 祭示天地
위 문구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해와 달을 숭배하였고, 천신지지에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 무리는 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으로 섬겼고, 자신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으로 불(不:해, 뒤에 "부"로 발음) + 여(黎:무리)라고 적거나 高(하늘나라) + 黎(무리)라고 또는 高(하늘나라) + 九(온세상 또는 중심지:8은 수도를 제외한 8방을 뜻하고 9는 온 세상 또는 중앙을 뜻한다) +黎(무리)라고 이름 지었다.
9. 국명
고려, 고구려 두 가지를 함께 쓰고 있다. 중국 사서에는 처음에는 고구려, 뒤에는 고려라는 국명이 보이는데 이 벽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고려와 고구려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0. 관구검(毋丘儉)의 고구려 침범시기
중국의 사서인 위지(魏志) 관구검전(毋丘儉傳)에는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이 정시년간에 1차, 정시 6년(245년)에 2차로 적혀 있고, 위지(魏志)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정시 5년(244년)으로 적혀 있으며, 삼국지(三國志) 권4 위서(魏書)4 삼소제기(三少帝紀) 제4에는 정시7년(246년)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0년(246년)으로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 시기는 사서 문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244-246년경이다.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妊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篙」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官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裡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余...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為幽州刺史毋丘儉所破] 烏丸鮮卑東夷傳高句麗傳
[七年春二月 幽州刺史□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三國誌卷四 魏書四 三少帝紀第四
관구검 기공비(記功碑)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까?
1906년 중국 길림성 집안현 판석령에서 도로공사 중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는 가로 26.4cm 세로 25.7cm에 자경(字徑) 약 2.7cm이다. 사서에 의하면 이 비는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東川王)을 추격한 해에 만든 것이다. 관구검 기공비에는 고구려 침범년도가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蓼 威寇將軍都亭侯蓼 行裨將軍領蓼 "으로 적혀 있다. 위 기공비 문구에 의하면 위나라는 244년에 고구려를 침범하고, 다시 다음해 245년에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은 244~246년 사이로 보인다.
앞에 나온 벽비 외에 몇 종류가 더 보이는데 벽비에 나오는 상황은 모두 동천왕 때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위 벽비 문구는 아주 한정된 시기 즉 동천왕 시대에 위나라의 관작을 받은 마힐도 승려나 지방 추장들의 입장에서 적은 것으로, 이를 고구려사 사료로 사용하기에는 좀 문제점이 있다.
다른 종류의 벽비
위에 나오는 벽비 외에 다른 종류의 벽비가 수개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위 벽비 문구와 연관되는 것으로 모두 동천왕 시대 상황을 적은 것이다.
가.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134자) 가로 25㎝, 세로 26㎝, 두께 2.3㎝
「正始武侵 宮百殊固諫慾鎩 還亡命存其固都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 (委+台)七年(246년)十月繼明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 殊代天府祖鄒牟王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旨?)記天地之中 銘存永世 隨登愿 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정시년간에 침범이 있었다. (침범이 있기 전) 동천왕은 백수가 간하자 죽이려 하였다. 백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례 보살피려 하였다. 흘계를 보내 (새로운) 도읍을 만들고 수와 백위와 고구려 지역 추장들을 보호하였다. 정시 7년(서기 246년) 10월에 명제에 이어 (제)왕이 (백수를) "護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하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수는 성민의 뜻에 따라 천부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을 받들었다. (?년) 가을 8월 보기병 2천으로 싸워 관구검은 혁현령에서 수천리를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 수천명을 항복받았다. 관구검이 궁성 북쪽을 뚫자 동천왕은 신하들 앞에서 고구려를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왕의 뜻으로 천지간에 일어난 일을 새겨 영원히 보존하고 때마다 윗사람에게 바쳐 보이고, 이 비를 영원히 세워두고, 이로써 백세를 전하게 하여 백수 성민은 대대로 이 비를 보라.」[註 동천왕 시대에 "護" 字를 간체인 "护"로 정말 사용하였는지 심히 의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위 벽비(壁碑)는 후에 중국이 간체를 사용한 시기에 위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제일 앞에 나온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
나. 흙으로 구운 네모판(50자)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食蒿而死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往丸都遣訖繼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宣. 정시년간에 병란이 끝났다. 동천왕은 간곡히 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죽이려 하였다. ( )는 쑥만 먹다가 죽었다. 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옛 도읍을 보존하고 불내성을 정성스레 보살피려 하였다. 환도에 가서 흘계를 보내 (새로운) 도읍을 만들고 위(位)와 수(殊)와 고구려 지역 추장들을 보호하였다. 위나라 정시 7년(246년) 백수가 선포하노라.」 [註 慾鎩은 宮不從固諫 뒤에 와야 하는데 새길 때 실수하였다. 또 제일 앞에 나온 벽비 문구와 대비해 보면, 固는 故의 誤字로 보인다.]
다. 흙으로 구운 여덟모기둥 비(86자) 밑바닥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故邑遂成 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의 옛 읍을 이어받았다. (제)왕 10년(248년)에 동서남북수는 명제에 이어 "逐多護寧東百殊"가 되어 관아와 관리를 현도에 두고 도읍을 비류에 두어 다스리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수가 천부를 대신하였고, 시조 추모왕의 뜻을 계승하여 백성들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백수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년 공들여 튼튼한 도읍을 현도군에 세우고 나라를 계속하였다.」
위 문구에 의하면 관구검의 침범이 있은 후 고구려의 도읍은 현도군(玄菟郡)에 있었다. 고구려의 도읍지가 현도군에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관구검의 침범을 받은 후 위나라에 사실상 굴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천왕의 뜻이 아니고 위나라의 강요와 위나라에 귀부하여 읍장(邑長), 백장(百長) 등 관작을 받은 일부 토착거수들과 마힐도 승려 때문으로 보인다.
혹자는 위 문구를 수성왕(차대왕) 10년(155년)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차대왕 10년에 관아와 관리와 도읍을 현도, 비류에 두었다(司吏玄菟定邑都沸流)고 즉 천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 정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차대왕 때 도읍을 현도군으로 옮긴 적이 없다. 관구검의 침범 때까지 고구려의 도성은 집안 방면에 있었다. 고구려가 차대왕 때 수도를 후한 현도군으로 옮겼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어이없는 소리이다. 현도군은 원래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사기구인데 고구려가 범 아가리 속으로 고구려 수도를 밀어 넣었다는 주장은 제정신으로는 할 소리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본기는 14년조부터 시작되고 있다. 즉 개로왕이 즉위하고부터 만 13년간 본기 내용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간혹 즉위 1-2년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궁중 내 사정으로 전왕이 죽은지 2년이나 3년째 되는 해에 신왕이 즉위하면서 공백기를 숨기기 위하여 즉위시기를 전왕이 죽은 해로 소급하면서 실제로는 즉위 원년이지만 본기상으로는 즉위 2년이나 3년으로 적혀 있는 경우이다.
개로왕 본기는 왜 14년조부터 시작되고 있을까?
삼국사기에서 본기의 공백이 있는 경우는 2가지이다. 하나는 궁중 사정으로 왕위의 공백기가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를 지은 후 강대국 금나라나 중국왕조를 의식하여 본기 내용 중 일부를 삭제한 경우이다.
개로왕 본기의 만 13년 공백기는 어느 것에 해당될까?
먼저 왕위공백 가능성을 살펴본다.
개로왕(蓋鹵王) 즉위 직전 본기 내용과 개로왕 본기의 앞 부분을 살펴본다.
「비유왕(毗有王) 29년(A.D 455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에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해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개로왕 14년(468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개로왕 15년(469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戍之」
비유왕 29년조는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이 문구에 나오는 사냥은 동족끼리 싸우는 경우에 사용한 용어이다. 그리고 흑룡(黑龍)은 북쪽에 있는 후왕(侯王)이라는 뜻으로 요서분국(遼西分國)의 후왕(侯王)을 지칭한 것이다.
비유왕 29년조의 뜻은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한강에서 반란군을 토벌하였고, 가을 9월에는 요서분국의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본국으로 와서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와중에 비유왕이 죽었다는 뜻이다. 비유왕 직전은 구이신왕이고, 구이신왕 이전은 전지왕이다. 둘다 온조백제계(溫祚百濟系) 왕이지만 비유왕은 구태백제계 왕이다. 그 때까지 백제지역에는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공존하다가 구이신왕을 끝으로 온조백제 대를 끊어 버리고 한반도 백제지역을 구태백제가 단독으로 통치하였다. 따라서 이 반란은 온조백제의 대를 끊어 버린데 분노한 온조백제계가 반란을 일으켜 구태백제계 왕인 부여씨 비유왕을 죽인 것이다.
비유왕 뒤 즉위한 개로왕 역시 부여씨(구태백제) 왕이므로, 구태백제계(仇台百濟系)인 요서분국(遼西分國)의 후왕(侯王)이 출동하여 비유왕 사망 후 개로왕을 즉위시킨 이상 왕위 공백기는 생길 수 없다. 따라서 개로왕 초기 만 13년간의 공백기는 왕위공백기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개로왕 본기 14년간의 공백기는 삼국사기를 지은 후 금나라나 중국왕조를 의식하여 개로왕 본기 앞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중국의 사서인 송서를 보면 개로왕은 A.D 458년 이전부터 이미 백제 장군들을 송에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명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여예를 보국장군에, 룡양장군 목금 여작을 룡양장군에, 녕삭장군 여류 미귀를 녕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註 위 문구 중에 "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이전에 발령받아 재직 중인데 백제국이 지방장관을 3년마다 한번씩 교체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이때 다시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 458년은 개로왕 4년이므로 위에 나오는 장군들 일부는 이미 개로왕 원년에 송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표문은 백제왕이 임명한 그대로 宋 황제도 임명하라는 백제왕의 통보서 성격을 띈 표문이다. 宋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宋나라의 관작을 백제왕이 마음대로 미리 수여하고 宋 황제보고 그대로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되는데, 그런데도 宋 황제는 백제왕이 요청한 그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때 겸직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은 餘氏 성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于氏, 沐氏 등 성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직위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을 비롯하여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정로장군 및 보국장군, 용양장군, 영삭장군, 건무장군 등이다.
그 후 宋.百濟 연합군은 北魏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을 점령하였고, A.D 465년경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 광양태수 등을 두었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를 보내니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혹자는 위 "比使宋朝" 문구를 고달, 양무, 회매 3인이 태시(註 A.D465-471년) 중에 송에 외교 사신으로 갔다고 해석하나, 위 문구는 위 3인이 송에 단순히 외교사신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고, 태시 중에 백제왕의 사자로 송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서에는 고달, 양무가 송으로부터 장군이나 태수 등 작위를 받은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백제가 남제에 보낸 표문에 고달의 직위가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양무의 직위가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회매의 직위가 선위장군 겸 참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A.D 463년경 백제와 송 연합군이 빼앗은 난하 서쪽 요서지방에 백제가 송 황제의 재가를 받음이 없이 단독으로 군현을 두고 고달, 양무, 회매를 태수 등에 임명하였음을 의미한다.]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에 백제가 군현을 설치한 것 때문에 송과 백제는 불화에 빠졌고, 이는 그뒤 A.D 471년경에 고구려가 백제와 송과의 불화를 이용하여 송과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을 포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중국의 사서에는 마한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책에는 월지국으로 적혀 있고 어떤 책에는 목지국으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어느 명칭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월지국이 맞다.
마한, 월지국이라는 용어는 우리 민족의 고대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 우리 민족은 하늘에 하늘나라가 있고, 하늘나라를 환하게 비춰주는 해와 달이 하늘나라 임금이라 믿었다. 이 하늘나라에는 해님과 달님이 하늘나라 궁전에서 별님들을 신하로 거느리고 낮에는 해님이, 밤에는 달님이 세상만사를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해님의 아들은 상상의 동물인 용(진)이라 믿고, 달님의 아들 역시 상상의 동물인 천마나 봉황으로 믿고, 해님의 아들이나 달님의 아들이 지상세계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하여 지상세계의 임금이 되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강대국의 왕은 자신을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 칭하였다.
그리고 복속국의 왕은 자신을 달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 칭하였다. 뒤에 이 말을 한자로 적음에 있어 천제의 아들은 천자, 진한, 진왕 등으로,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진국으로 적었다. 그리고 달님의 아들은 월지, 달지, 마한 등으로 적고,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월지국, 달지국, 마한 등으로 적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오직 강대국의 왕만이 해님의 아들(천자, 진한, 진왕)을 칭할 수 있었고, 비왕이 다스리는 나라나 복속국의 왕은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지 못하고 달님의 아들(월지, 마한)이라 칭하였다.
고대 단군조선 때 한반도는 단군조선의 비왕인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다. 따라서 고대에는 한반도를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월지국, 달지국, 마한)라 불렀다.
단군조선이 망한 후 한반도는 독립국이 되었는데, 한반도 칭호는 馬汗에서 馬韓으로 바뀌었으나, 월지, 달지 칭호는 종전처럼 그대로 불렀다. 즉 단군조선이 멸망하고부터 마한, 월지, 달지 등은 비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한반도 또는 한반도의 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사서에 마한이 월지국 또는 마한으로 기재되어 있으면서도 마한의 王이 辰王으로 적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한왕은 마한 또는 진왕이라 불렀고, 마한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월지국 또는 달지국이라 불렀다. 삼국志 위지 한전에 나오는 "馬韓..凡五十餘國..辰王治月支國臣智" 문구는 마한왕이 마한 영역 내에 있는 50여 소국을 다스렸다는 뜻이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우리 민족의 고대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삼국지 위지 한전에 적혀 있는 월지국을 목지국으로 적었는데 이는 오기이다.
94년 필자는 ""不黎(夫餘)史 硏究[불여사 연구)"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그 책 내용 중에 국내외에서 처음으로 구태백제 학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나 재야사학자 모두 필자의 구태백제 학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가 정식 사학교수가 아니고 이름도 미미한 재야사학자에 불과하다는 점과 그 전에 강단사학계는 구태는 온조나 비류의 다른 발음이라는 주장, 또는 구태는 고이왕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분은 구태를 온조와 다른 인물로 보면 2개의 백제가 동시에 존재했다고 보아야 되는데, 중국의 사서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아무리 보아도 2개의 백제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으므로, 온조와 구태가 다른 인물이라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태가 온조 또는 비류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은 사서와 배치되는 주장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비류, 온조, 구태 모두 백제의 시조로 적혀 있고, 비류와 온조는 존재시기가 비슷하지만 구태는 비류나 온조와 존재시기가 다르다. 비류와 온조는 기원 전후에 걸쳐 존재한 인물인 반면에 구태는 후한서에 의하면 1세기 중엽에서 2세기까지 부여왕자 또는 부여왕으로 등장하는 인물이고, 3세기 초에 사망한 공손탁의 사위이다.
필자의 주장에 대하여 어떤 분은 중국의 사서에 부여왕의 아들 또는 부여왕으로 나오는 위구태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구태는 전혀 다른 인물이며, 위구태는 고구려의 북쪽에 존재한 부여왕이고, 백제의 시조 구태는 고구려 남쪽에 존재한 백제왕이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부여왕 위구태를 백제의 시조로 보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대비해 본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 北史 列傳第八十二 百濟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차츰 강성해져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為東夷強國.」隋書 列傳第四十六 百濟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 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북사 및 수서에도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三國史記 百濟本紀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대비해 보면 부여왕 위구태와 백제의 시조 구태는 동일인물이다.
그렇다면 부여왕 위구태가 왜 백제로 이동하여 백제의 시조가 되었을까?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본다.
A.D 44년에 후한 광무제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군현을 두었다. 그 몇 년 후 A.D 48년에 후한은 부여와 통교하여 고구려를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하여 A.D 49년에 선비와 같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모본왕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동以恩信待之 乃復和」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가 고구려에 점령되므로써 요서와 요동 및 한반도에 설치된 중국군현은 모두 소멸되었다. 그후 후한 안제 때 후한은 요동, 요서 지방을 다시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지만 고구려의 배후인 한반도 방면에는 아직 군현을 재건하지 못하였다.
그후 후한 요동태수 공손탁은 부여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를 포위하였고, 그 아들 공손강도 부여와 동맹을 계속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계속 강성해지자 후한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도 포위하기 위하여 둔유현 이남 황지 즉 지금의 황해도 방면을 점령하여 A.D 204년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는 북쪽에 있는 고구려 외에도 남쪽에 온조백제, 익산 금마 마한, 신라가 있었기 때문에 토착세력인 한 무리를 장악하지 않고는 대방군이 고구려의 남쪽 방면을 계속 장악하기 어렵자 부여 무리를 대방군으로 이동시켜 온조백제와 마한을 점령하게 하므로써, 대방군은 부여 무리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도 포위할 수 있었다. 공손탁이 딸(종녀?)을 위구태의 처로 준 것은 이 무렵 공손씨와 부여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부여왕 위구태는 공손강의 협력으로 부여 무리를 이끌고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대방고지)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고, 대방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다. 구태백제가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즉 부여 무리의 한반도 이동은 후한의 군사적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후한과 부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광개토왕비문에 왜로 적혀 있는 익산 금마 마한과 구태백제의 존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백제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사서를 막론하고 지리지는 아주 중요하다.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리지에는 영역과 위치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서는 상당히 세월이 지난 후 만들어 진다. 따라서 사서를 편찬한 사람은 직접 보거나 들은 사실로 사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만들어진 각종의 사료를 참조하여 지리지를 만든다.
그런데 간혹 정치적 의도나 착각에 의하여 지리지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질 때가 있다.
지리지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질 경우는 크게 나누어 2가지인데, 하나는 정치적 목적으로 고의로 지리지를 왜곡시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실수로 위치를 착각한 경우이다.
고의로 지리지를 왜곡시키는 경우는 제외하고, 사서 편찬자가 위치를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경우는 왜 생길까? 이는 지명이동 때문이다.
지명이 이동되는 경우는 만주나 중국 방면은 주로 중국왕조의 군현 이동 때문에 발생하였고,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 방면은 이주민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이주한 곳에 그 전에 살던 곳의 지명을 사용하므로서 같은 지명이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러한 지명 이동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지리지에 적혀 있는 지명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국내의 상당수의 사학교수들도 지명이동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지명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큰 실수를 범하였다.
한국의 사학자들간에 한사군, 안시성, 임나 등의 위치에 대하여 극심한 논쟁이 일어나는 것도 지명 이동 때문이다.
한사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지명이동을 고려하지 않은 이병도님과 그 학설을 추종하는 분들은 중국군현이 마지막으로 존재한 곳과 한사군이 처음 설치된 곳을 같은 곳으로 보았다. 따라서 한사군은 처음부터 한반도와 압록강 북쪽 일부지역에 걸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명 이동을 고려하는 사학자들은 한사군은 처음 난하 이동 만주 남부지역에 설치되었다가 후에 중국왕조가 강성해지면서 한반도 일부 지역에도 설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사군은 처음 위만조선 지역과 위만조선 동쪽 고구려 지역 일부를 점령하여 설치되었는데, 만주 요녕지역에 설치되었다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폐지된 낙랑군의 속현 중 일부는 후한 광무제 때 지금의 평안도, 황해도 방면에 다시 설치되었고, 그 후 후한 말 공손강은 지금의 황해도 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만주 요녕지방에 설치되었다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폐지된 낙랑군의 속현 중 일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고구려 안시성
대부분의 사학교수들은 안시성이 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고구려 안시성과 한나라 요동군 안시현이 동일한 곳이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전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전한 때 요동군 안시현은 요하하류 방면에 설치되었고, 후에 북위나 후주 때에는 북경과 난하 사이에 설치되었다. 수서지리지에 의하면 수나라 때 안시현은 토은현과 함께 구 안락군에 속해 있었고(又有舊安樂郡 領安市,土垠二縣 後齊廢土垠入安市 後周廢安市入密雲縣 開皇初郡廢 有長城 有桃花山 螺山 有漁水), 위서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安樂郡 延和元年置交州 真君二年罷州置 領縣二...土垠真君九年置 安市二漢 晉屬遼東 真君九年並漢平屬焉). 즉 안시라는 지명은 처음 요하하류 방면에 설치되었다가 뒤에 북경에서 난하 사이로 이동하였다.
고기에 의하면 당나라 정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구려 안시성, 건안성은 북경에서 난하 사이에 있었다.
임나
고대에 해와 달을 신으로 숭배한 부여 무리 중 일부는 해 뜨는 동쪽을 향하여 이동하였고, 한반도, 대마도, 구주를 거쳐 본주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 무리들은 이동한 곳에서도 전에 사용하던 명칭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한반도, 대마도, 구주, 본주 등지에는 같은 명칭이 많이 생겼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를 이용하여 신공황후가 대마도 내 소국인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 것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정복한 듯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고, 일본의 국수 우익 사학자들은 한반도 가야 지역에서 나오는 명칭이 대마도나 구주 등지에도 나오자 대마도나 구주에 있던 소국들의 위치를 한반도 가야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진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서기 문구를 살펴본다.
「섭정전 10월 화이진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 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고 범선은 파도에 따라갔다. 노를 쓸 필요 없이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가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것으로 천신지지가 모두 도와 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을 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이 있다. 일본이라 한다. 또한 성왕이 있다. 천황이라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방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감고 스스로를 포박하였다. 지도와 호적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금후는 길이 건곤과 같이 엎디어 양마의 일을 하겠습니다. 선타를 말리지 않고 춘추로 말의 빗 및 말의 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 바다가 멀지만 매년 남녀의 손으로 만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거듭 맹서하여 "동에 나오는 해가 서에서 나오지 않는 한 또 아리나례하가 역류하고 내(川)의 물이 하늘에 올라가 별(星)로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춘추의 조공을 빼거나 태만하여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아니하면 천신지지와 같이 죄를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입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삼군에 호령하여 '자복하는 자를 죽이지 말라'라고 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보의 나라를 얻었다. 또 사람이 스스로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의 곳간을 봉하고 지도와 호적 문서를 거두었다. 황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중략..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관가둔창을 정하였다. 이가 소위 삼한이다.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삼국사기에는 왜가 삼국을 정벌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는 왜가 한반도에 있는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신공황후가 정벌한 신라, 백제, 고구려는 대마도에 신라, 고구려, 백제 무리가 이주하여 모여 사는 촌락국가를 정벌하였기 때문이다. 위 문구에는 신라 바로 옆에 백제, 고구려가 있고 백제와 고구려는 사람을 신라로 보내어 가만히 엿보고는 신공황후에게 항복하였다. 이를 보면 위에 나오는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웃 동네에 있었다.
지명 이동은 흠명천황본기에도 나온다.
「흠명천황 2년(541) 여름 4월 안라의 차한지, 이탄해, 대부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와 졸마의 한지와 산반해의 한지의 아들과 다라의 하한지 이타와 사이기의 한지의 아들과 자타의 한지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과 백제에 가서 성명왕(백제 성왕의) 조서를 들었다. 二年 夏四月 安羅次旱岐夷呑奚 大不孫 久取柔利 加羅上首位古殿奚 卒麻旱岐 散半奚旱岐兒 多羅下旱岐夷他 斯二岐旱岐兒 子他旱岐等 與任那日本府吉備臣(闕名字) 往赴百濟 俱聽詔書」
위에 나오는 안라는 함안의 아라가야가 아니고 안라 무리들이 이주한 대마도의 소국 안라국이고, 가라도 고령의 고령가야가 아니고 대마도의 소국 가라국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의 아라가야나 김해의 금관가야는 이미 멸망한 후이고, 단지 고령의 고령가야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의 우익 국수 사학자들은 위에 나오는 안라, 가야 등이 함안, 김해, 고령 등지의 가야국이라고 주장하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진출하였다며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에는 지명 이동이 빈번하였고, 또 같은 이름이 여러 곳에 있었으므로, 군현 이름으로 위치를 파악할 때는 그 군현이 어느 시기에 어디에 있을 때의 위치를 말하는 것인지 고려해 보아야 하고, 한반도 남부지방, 대마도, 구주에서 나라 이름으로 위치를 파악할 때는 그 나라가 경상도 지방에 있는 근국인지 아니면 대마도나 구주에 이주한 무리들이 사용한 자제국인지? 전후 문구를 잘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흉노라는 명칭은 사기 흉노전에서 처음 나오는데, 흉노는 특정민족의 이름이 아니고 만주에 거주하는 기마족이 중국왕조의 영역을 자주 침범한다고 중국왕조가 만주에 거주하는 무리들을 비하하여 부른 명칭이다. 그런데 사기 흉노전에는 흉노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2가지로 적혀 있는데, 넓은 의미의 흉노는 중국을 침략하는 만주의 기마족을 가리키고, 좁은 의미의 흉노는 몽고 방면 기마족만 가리킨다.
사기 흉노전에는 흉노가 어떻게 적혀 있는지 살펴본다.
- 만주 기마족을 위치, 생활양식, 종족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불렀다.
지리적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는 지역은 조선으로 적혀 있다. 사기 흉노전에 조선으로 적혀 있는 지역은 대체로 발해연안, 요서지방, 요동반도 등 만주남부 지방이다. 또 생활양식을 기준으로 하여 농어업족은 예(濊)로, 사냥족은 맥(貊)으로, 유목족은 호(胡)로 각 적혀 있다.
- 만주 기마족을 세분하여 개별국가 이름인 부여, 산융, 견이(畎夷), 견융(犬戎), 면저(撓諸), 곤융(緄戎), 적(翟), 의거(義渠), 대려(大荔), 언지(焉氏), 구연(朐衍),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으로도 적혀 있다.
- 고대 우리 민족인 구려 또는 고구려를 비하하여 산짐승이나 개(犬)로 비유하여 적었다.
고대 구려 무리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왔다고 칭하였고, 이 말을 뒤에 한자로 적음에 있어 불여(不黎,不與→夫餘), 구려(九黎→句麗), 九桓 등으로 적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구려(九黎) 무리들을 비하할 의도로 “九”를 같은 발음의 "狗"로 바꾸고 다시 같은 뜻의 견이(畎夷), 견융(犬戎) 등으로 글자를 바꾸어 적었다. 또 부여의 사냥족인 맥족이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고 부여의 사냥족을 산짐승에 비유하여 산융(山戎)으로 적었다. 즉 구려 무리들을 멸시할 의도로 글자 작란을 하였다.
- 강학상 기자조선 또는 위만조선이라 부른 나라는 사기 흉노전에 예(濊), 조선(朝鮮), 동호(東胡), 흉노(匈奴)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적혀 있다.
이는 발해연안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농어업족이라고 예(濊)로, 발해연안 북쪽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유목족이라고 동호(東胡)로, 중국의 동쪽에 있다고 조선(朝鮮)으로, 중국을 자주 침략했다고 하여 흉노(匈奴)로 각 적혀 있다.
이처럼 사기 흉노전에는 만주에 살고 있는 기마족이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져 적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넓은 의미의 흉노는 만주에 거주하는 기마족 전부를 가리키고, 좁은 의미의 흉노는 몽고 방면 기마족을 가리킨다.
양서에는 신라는 백제에서 동남으로 5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양서 신라전 문구를 살펴본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중략..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則其一也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驪 百濟接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신라하면 우선 경상도 지방을 떠올리고, 백제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을 떠올리는데, 신라가 백제에서 5천여리 동남쪽에 있다고 하니 기존의 지식으로는 위 문구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양서는 중국의 정사이므로, 사서를 만든 사람이 헛소리를 했을리는 만무하다.
위 문구를 보면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고 적혀 있으면서도 이어서 적혀 있는 글에는 신라는 백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만약 신라가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는 문구는 거짓이 되고, 신라가 백제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면 신라가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문구는 거짓이 된다.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일까?
사실은 어느 쪽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양서에 적혀 있는 백제는 한군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두 군데를 말하고 있다. 즉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것은 백제본국이고, 신라와 5천여리 떨어져 있는 백제는 요서에 있는 백제군이다.
다시 양서 백제전 문구를 살펴보자.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即其一也 後漸強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위 문구를 보면, 백제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었는데, 진나라 시대에 고구려는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 또한 요서.진평 2곳에 백제군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즉 백제는 진나라 시대에 요서.진평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두었다.
양서에서 신라와 5천여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백제는 요서에 있는 백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요서.진평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양서에는 상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통전에는 요서에 있는 백제군은 당나라 때의 유성군에서 북평군 사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진평은 지금의 중국 복건성 천주 방면이다..
어느 사학자는 고대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였다. 그 분은 그 주장의 근거로 일본서기 민달천황 원년(A.D 572년) 10월조에 일본 왕실이 백제대정(百濟大井)에 궁궐을 만들었다는 내용. 서명천황 11년(A.D 639년) 가을 7월조에 백제천 가에 궁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백제궁이었다는 내용, 서명천황 13년(A.D 641년) 겨울 10월 9일에 제명천황이 백제궁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 같은 달 18일에 백제궁 북쪽에다 빈궁을 짖고 이름을 백제대빈이라 했다는 내용, 12세기 초에 편찬된 고대 일본 불교 관계 기록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 추고천황 원년(A.D 593년) 법흥사라는 절에는 당시 최고 실권자인 소아마자(蘇我馬子) 등 100여명이 모였을 때 백관이 모두 백제복을 걸치고 있었다는 내용 등을 그 주장의 근거로 든다.
그러나 위 문구만으로 고대 일본이 백제의 식민지라는 주장은 좀 성급하다. 왜냐하면 백제와 왜는 일본서기 문구에 의하면 백제는 부형의 나라, 왜는 자제의 나라로서 서로 공존관계에 있었지 한쪽이 어느 한쪽을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백제가 일본으로 진출한 시기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때이다. 신공황후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오녀의 딸로 추정되는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던 동해 일월리에 신라가 군현을 설치할 때 그곳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간 까닭에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히 강하였는데, 신공황후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백제가 보낸 사신 구저(久氐) 등이 백제와 형제의 나라로 맺자는 제의를 받아들여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가 가야 지역을 평정할 때 군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후 구태백제가 더 강해지자 신공황후는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당시 구태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던 위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A.D 238년부터 위나라와 교류하고 백제와는 형제의 나라 관계를 끊었다. 그 때문에 신공황후는 구주에서 구태백제를 따르는 구노국(狗奴國)의 비미궁호소(卑彌弓呼素)의 공격을 받아 죽고 그 내란으로 신공황후가 맹주로 있던 야마대연맹은 와해되었다.
그후 일본은 백제왕이 일본을 직접 다스리는 직할통치 체제로 되었는데, 이 무렵의 역사를 적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후미에는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의 사망, 즉위 등에 관한 사실이 적혀 있다.
「55년 백제 초고왕 죽다. 百濟肖古王薨」 [註: 255=375(근초고왕 죽은 해)-120]
「56년 구수왕 즉위하다. 百濟王子貴須立爲王」 [註: 256=376(근초고왕 죽은 다음해)-120]
「64년 구수왕 죽고 침류왕 즉위하다. 百濟國貴須王薨 王子枕流王立爲王」 [註:264=384(근구수왕 죽고 침류왕 즉위한 해)-120]
「65년 침류왕 죽다. 王子 아화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百濟枕流王薨王子阿花年少叔父辰斯侵奪立爲王」 [註:265=385(침류왕 죽고 진사왕 즉위한 해)-120]
그뒤 A.D 390년에 구태백제는 일본열도의 백제계 소국들을 지원하여 백제계 세력이 강한 대화지방에 응신조를 세웠는데, 응신조는 그해부터 백제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왕자 미해를 인질로 받는데 기여하였고, 그 때문에 구태백제와 동일세력인 응신조는 신라의 지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
그후 A.D 487년에 백제는 다시 힘을 회복하여 대마도를 평정하고 다음해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를 세우고 백제와 왜 군사는 요서로 출동하여 북위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백제의 영역을 넓혔다. 이후 고구려와 북위의 공격을 수회 받았지만 백제와 왜 군사는 이를 잘 물리쳤다. 이때까지는 백제가 왜 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A.D 502-503년경에 백제가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고구려에 상실하고, 또 A.D 501년에 일본열도의 백제계 세력을 등에 업은 무령왕이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죽이고 즉위하므로서 이후 일본열도왜를 등에 업은 세력이 백제본국 세력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해졌지만 일본열도의 백제계 세력도 강해져 이후 백제본국은 멸망할 때까지 일본열도 백제계 세력의 지원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 그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열도의 백제계 세력이 백제복국을 위하여 백제복국군을 보냈으나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한반도의 백제계 지배층은 일본열도로 건너갔는데, 이때 일본열도의 지배층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의 지배층을 일본열도 왜 조정의 관리로 편입하였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백제와 고대 일본은 식민지 관계라기 보다 처음은 형제의 나라 관계였고, 그 뒤는 백제본국이 일본을 직할통치 하였으며, 그 뒤는 백제본국이 대화지방의 백제계 소국들을 지원하여 응신조와 인현조를 세워 다시 형제의 나라로 복원되었으나, 백제본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일본에 있던 백제계 세력이 무녕왕을 도와 동성왕을 몰아낸 후에는 백제본국과 일본열도의 백제계 세력간에 위상이 역전되어 백제본국은 멸망할 때까지 일본의 백제계 세력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변하였다. 따라서 막연히 고대 일본을 백제의 식민지라고 보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어느 한 시기만을 본 것이다.
재야 사학자 어느 분은 한사군은 허구이고, 한군현은 요동이나 한반도에 설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분은 한군현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학자는 일제의 반도사관에 물들어 있는 자이며, 강단사학자들은 잘못된 학설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밥그릇이 날아 갈까봐 반도사관에 근거한 학설을 계속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들이 밥그릇이 날아 갈가봐 잘못된 학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분이 공격하는 주대상은 주로 고 이병도님과 그 학설를 따르는 사학자들이다.
한사군이 허구라는 주장은 중국의 정사는 물론 삼국사기, 환단고기 등 우리민족의 사서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따라서 이분들의 주장은 사서와 배치되므로 무시한다.
한사군이 설치된 지점에 대한 논쟁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그 때는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설과 요동에 설치되었다는 설로 갈리어 있었다. 요동설은 조선시대 후기에 실학파 사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한반도설은 이병도님 등이 주장하였는데, 해방 후 상당기간까지 이 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의 통설은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설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중국왕조의 군현이 요동지방 외 한반도에도 설치된 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언제 설치 되었는가?
기원전 108-107년에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은 전에 위만조선 지역과 그뒤 점령한 고구려 지역이었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경계는 요수(난하)였고, 그 서쪽에는 한나라의 요동군, 요서군,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등이 있었다. 한나라는 난하 동쪽 지역은 너무 멀다고 포기하고 난하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조선은 너무 멀고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史記 朝鮮傳
그리고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위만조선의 동변은 요하였고 그 동쪽에는 고구려(북부여)가 있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위만조선의 영역은 난하에서부터 요하까지였다. 그런데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진번군, 임둔군, 낙랑군을 설치한데 이어 다음해 기원전 107년에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 일부를 점령하여 그곳에 현도군과 낙랑군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전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초기의 한사군 위치는 난하 바로 서쪽에서부터 단단대령 동쪽까지였다. 그런데 한사군의 영역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심한 변동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사군은 전한 때 요동지방에 설치되었지만 전한 때는 아직 한반도에 설치되지 못하였다. 이는 고구려에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때인 A.D 44년에 후한 광무제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고구려가 A.D 32년에 멸망시킨 평안도 방면 낙랑의 전 우거수 소마시를 꾀어 그곳에 군사를 보내어 점령하고는 청천강 이남 지방에 낙랑군의 속현을 설치하였다. 한반도에는 이때 한군현이 처음 설치되었다.
「대무신왕 27년(A.D 44년) 가을 9월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 伐樂浪取 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건무 20년 한 염사인 소마시 등이 낙랑군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 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절 조공하였다.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貢」後漢書 韓傳
진서지리지에 의하면 이때 설치된 청천강 이남 지방의 낙랑군 속현 명칭으로 조선, 수성, 둔유, 혼미, 루방, 사망 등이 나온다. 이 현들은 요녕지역에 있다가 소멸된 낙랑군의 속현 명칭으로, 이때 설치된 현들은 A.D 49년 고구려의 한나라에 대한 대공세가 있을 무렵 소멸되었다.
그후 후한 말기 A.D 204년에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강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둔유현 이남 황지 즉 황해도 지방을 점령하여 대방군을 설치하고 그곳에 함자, 대방, 해명, 열구, 장잠, 제해, 낙도 등 7성을 두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은 둔유현 이남 황지에 대방군을 두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왜와 한 (관련 업무는)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 倭韓遂屬帶方」三國志
그후 A.D 238년에 위나라는 공손씨로부터 대방군을 접수하고 그 북쪽에 새로 낙랑군을 두어 위2군을 설치하였다.
「경초중(A.D 237-239년)에 명제는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 인수를 주고 그 아래에는 읍장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을 매우 좋아해서 하호까지 가짜 인수, 의책을 가지고 있었고, 1,000여 인이 군으로 찾아와 조알하였다. 부종사 오림이 한국은 본래 낙랑군이 통치하였으므로 진한 8국을 분할해서 낙랑군으로 한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한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다. 2군은 한을 멸망시켰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於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仮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三國志 魏志 韓傳
위 군들은 그뒤 위나라가 멸망하면서 진나라에 소속되었고 그 뒤 고구려 미천왕 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한반도에는 이후 중국군현이 설치되지 않았다.
「미천왕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미천왕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위에 나온 내용을 정리하면 한반도에 한군현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후한 광무제 때이고 중국왕조의 군현이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은 A.D 313-314년이다. 자기 견해와 맞지 않는다고 반도사관에 물들어 있느니,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틀린 반도사관을 고집하고 있느니 하며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사학자로서 취할 태도가 못된다.
사서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역년은 사서에 따라 서로 다르다.
먼저 단군조선의 역년을 살펴본다.
◇당요(唐堯)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상(商) 무정(武丁) 8년 갑자(B.C 1317년:상 무정 8년을 갑자년으로 보았다)까지 1,017년으로 보는 견해
東史綱目, 海東繹史, 東史輯略 등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상 무정 8년 갑자(B.C 1317년:상 무정 8년을 갑자년으로 보았다)까지 1,017년으로 보고 그후 기자동래시(B.C 1122년)까지 196년 동안은 단군의 후손들이 상전(相傳)하였다고 보는 견해
東國歷代總目, 東史寶鑑, 東國歷代史略 等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상 무정 8년 을미(B.C 1286년:상 무정 8년을 을미년으로 보았다)까지 1,048년으로 보는 견해
東國通鑑, 東史纂要, 東史補遺, 東國文獻備考 等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상 무정 8년 을미(B.C 1286년:상 무정 8년을 을미년으로 보았다)까지 1,048년으로 보고 그후 기자동래시(B.C 1122년)까지 164년 동안은 단군의 후손들이 상전하였다고 보는 견해
應制詩註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B.C 1139년까지 1,195년간 존속했다고 보는 견해
揆園史話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B.C 426년까지 1,908년간(전기단군조선 + 중기단군조선) 존속했다고 보는 견해
三國遺事
◇당요 25년 무진(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2,096년간(전기단군조선+중기단군조선+후기단군조선) 존속했다고 보는 견해
桓檀古記 檀君世紀
[註 삼국유사에는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가 당요(唐堯)와 같은 때라고 적혀 있다. 현존하는 삼국지 위서에는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므로, 일연(一然) 님이 삼국유사를 지을 때 본 위서가 어떤 것인지 의문이 생기나, 북위서는 아닐 것이므로, 일연 님이 본 위서는 삼국지 위서로 보인다. 그리고 일연님이 위서를 보았을 때는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으나, 현존하는 위서에는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는 것은, 중국의 사가들이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을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중국의 사가들이 당요 원년을 갑진(B.C 2357년)으로 보자[集解徐廣曰 "號陶唐" 皇甫謐曰 "堯以甲申歲生 甲辰即帝位 甲午徵舜 甲寅舜代行天子事 辛巳崩 年百一十八 在位九十八年] 조선시대에 지은 사서에는 단군조선 개국원년이 당요 25년(무진)으로 바꾸어 적혀 있다. 어느 것이던 무진년은 변동이 없다.]
위에 나온 사서에는 단군조선의 역년을 1,048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1,048년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왕검 단군부터 소태 단군까지 전기단군조선의 역년이다. 이 견해는 왕검이 세운 전기단군조선을 색불루가 무력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그 후 존재한 중기단군조선과 후기단군조선을 전기단군조선과 별개의 나라로 본 것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역년을 살펴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적혀 있는 고구려 역년은 B.C 37년부터 A.D 668년까지이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기 10년조에 문무왕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는 내용에 나오는 고구려 역년은 800년 가까이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기 27년조에 나오는 당나라의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의 글에는 고구려 역년이 900년으로 적혀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적혀 있는 고구려 역년은 (고주몽)고구려 역년이고, 문무왕기에 적혀 있는 고구려 역년 800년 가까이는 (고주몽)고구려 역년과 고구려(북부여) 역년 중에서 고구려(북부여) 5세 동명 단군 이후부터 (고주몽)고구려 멸망 시까지 역년이다. 그리고 고구려 역년 900년은 해모수가 고구려(북부여)를 세운 후 B.C 232년에 멸망한 단군조선의 5가들을 회유하여 단군조선의 진한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부터 (고주몽)고구려 멸망 시까지 역년이다. 즉 김부식은 고주몽고구려만 고구려로 보았고, 문무왕은 동명계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보았고,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은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를 모두 같은 나라로 보았다. 한서 등에는 고구려(북부여)와 (고주몽)고구려가 모두 고구려로 적혀 있다.
백제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칭하는 어느 강단사학자는 백제의 초기 건국지는 남만주 금주지방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백제는 B.C 18년에 남만주 금주지방에서건국되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시조가 비류, 온조, 구태 3명으로 적혀 있다. 즉 백제는 시조가 3명인 3개의 나라이다. 그런데도 백제본기에는 1개의 나라로 적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백제의 건국시기와 건국장소는 분명하게 적혀 있지만 비류백제와 구태백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적혀 있지 않다.
먼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에 대하여 살펴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고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한데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와 온조는 한산 부아악에서 지형을 살피다가 그곳 어딘가에 수도를 정했고, 비류는 바다가에 도읍을 정했는데, 그때는 B.C 18년이라고 적혀 있다. 백제본기에는 그 후 온조가 사슴을 잡아 한수 이남지방을 다스리는 마한왕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온조가 처음 궁성으로 사용한 위례성은 한수 이북에 있었다. 그후 온조 13년에 5호(虎)로 지칭된 무리가 궁성으로 들어오고 그 와중에 소서노가 죽자 온조는 한수 이남으로 옮겨 한수 이남에 하남위례성을 지었다. 즉 온조의 건국지는 만주 금주 방면이 아니다.
다음으로 구태백제에 대하여 살펴본다.
구태는 후한 말 요동왕을 칭한 공손탁의 사위이므로, 구태도 그 시대의 사람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가 나라를 세운 장소가 대방고지라고 적혀 있는데, 이곳은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 황지를 점령하여 대방군을 둔 황해도 방면이다. 그리고 중국의 사서에는 구태의 사당(廟)이 웅진(공주)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구태가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고지이나 수도는 웅진에 두었고, 세운 시기는 후한 말이었다. 즉 구태는 후한 말경에 생존한 사람이다.
이 분은 북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구태가 나라를 세운 장소가 대방고지라고 적혀 있자 대방고지는 남만주 금주지방이고, 온조는 B.C 18년에 남만주 금주 지방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북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운 사람은 온조가 아니라 구태이고, 구태는 후한 말경에 생존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구태는 후한 말에 생존한 사람이지 B.C 18년경에 생존한 사람이 아니고, 구태백제의 건국지는 대방고지이지 남만주 금주 지방이 아니며, 또 금주 지방에 대방군이 설치된 시기는 A.D 314년경이지 B.C 18년이 아니다.
온조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하여 한강 이북이라는 설과 한강 이남이라는 설로 견해가 갈린다.
고려 때부터 조선후기까지는 한강 이남이라는 설 그 중에서도 직산에 있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직산현은 옛 명칭이 위례성이고, 온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도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彌鄒忽仁州尉禮城今稷山)라고 적혀 있다.
먼저 위례성의 의미부터 살펴본다. 위례성의 위(慰.尉)는 하늘(위=上.高)에 있는 해를 가리킨다.
고대에 독립국의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하였는데, 이들은 해님을 뜻하는 不, 高, 尉, 白, 解 등 글자나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진(辰:龍)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복속국의 왕은 마(馬), 와(蛙)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온조가 사용한 "위"는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글자로서 달님의 아들을 뜻하는 마한(馬韓)이나 월지(月支)보다 상위에 있는 글자이다. 그리고 예(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즉 위례는 천제의 아들이 있는 무리를 뜻한다.
온조는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위"자를 사용하여 한수 이남의 마한이나 한수 이북의 낙랑(樂浪)과 동등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祚:天子의 자리)이라는 뜻의 온조(溫祚)나 백제(百帝)와 같은 맥락에서 지은 칭호이다.
그렇다면 온조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은 어디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살펴본다.
온조가 온조국을 세운 후 한강 남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계속 온조국을 공격한 무리는 북쪽에 있는 말갈(靺鞨)과 동쪽에 있는 낙랑(樂浪)이다. 이 낙랑은 춘천 방면에 수도를 둔 강원도 방면 낙랑이고, 말갈은 강원도 방면 낙랑에 복속한 기마족 무리이다. 이를 보면 온조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었다. 만약 온조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이 한강보다 남쪽에 있었다면 마한의 공격을 받는 것은 몰라도 낙랑이나 말갈로부터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조는 재위 13년에 위례성을 빼앗기고 무리를 거느리고 한수 이남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온조가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도읍한 곳에 대하여 조선시대는 대체로 하남시 방면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방면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온조가 마한으로부터 제후로 봉 받은 금마산이나 십제국이 있었는 마한의 동북땅은 어디쯤일까?
금마는 마한을 높여 부른 말이고 금마는 마한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한이 있는 곳이 중국의 사서에는 월지국(月支國) 또는 목지국(目支國)으로 적혀 있다. 대부분 사학자들은 금마산 하면 익산 금마를 떠 올리는데, 그런 견해라면 금마산은 익산 금마가 되고, 온조가 세운 십제국은 금마산(익산 금마)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온조가 마한으로부터 제후로 봉 받은 금마산이나 십제국이 있었는 마한의 동북땅이 어디쯤인지 알려면 둘 어느 하나의 위치를 알면 나머지는 역산하면 알 수 있다. 마한의 도읍지인 금마산의 위치에 대하여 이병도씨는 직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직산 위례성은 사실은 온조가 사용한 성이 아니고 마한이 궁성으로 사용한 성이며, 직산 부근에 궁 명칭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는 것을 방증으로 들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온조가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이 직산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곳이 마한의 동북땅이라면 마한의 도읍지인 금마산은 예산이나 홍성 금마 방면이 된다.
마한의 도움으로 직산 방면에 십제국을 세운 온조는 성궐을 지었다. 이때 온조가 궁성을 위례성이라 부르지 못하고 성궐이라 부른 것은 위례성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명칭인데, 그 당시 마한의 제후국으로 있던 온조로서는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에 온조는 위례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고부터 직산의 성궐도 높여서 위례성이라 불렀다.
마리(摩離), 오이(烏伊), 협보(陜父)는 무슨 직책인가?
환단고기 북부여기,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등에는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고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과 비류수 상류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계해 2년(B.C 58년) 겨울 10월 단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명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니 사람이 범상치 않으므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 해 나이가 23세였다. 이때 하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주몽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보 등 덕으로 사귄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는지라 추병에게 붙들리까 염려되어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지금 도망가는 길인데 잡으러 오는 군사가 뒤를 쫓고 있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癸亥二年 冬十月 帝崩 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先是 帝無子 見高朱蒙 爲非常人 以女妻之 至是卽位 時年二十三 時 下夫餘人 將欲殺之 奉母命 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 行至분陵水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奈何 於是 漁鼈浮出成橋 始得渡 於鼈乃解」桓檀古記 北夫餘紀
「전략..고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동부여)을 택하여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남으로 도망하였다가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旣長周遊四方擇迦葉原而居之選於官家爲牧馬末機爲官家所忌與烏伊馬籬陜父逃至卒本適夫餘王無嗣朱蒙遂以王入承大統是爲高句麗始祖也」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위에서 고주몽을 따라갔다는 오이, 마리, 협보는 어떤 직책을 말하는 것일까?
고구려(북부여) 때 정치제도는 중앙에 천왕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4가라는 중앙 귀족계급이 있었고, 이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서.남.북 각 1방씩 맡아 다스렸다. 그리고 각 가 내에는 중.소 규모의 수많은 제가들이 있었는데, 제가들은 각 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자기들이 각 맡은 지역을 다스렸다. 또 왕의 보좌기관으로 오간, 마려가 있었고, 또 나라의 원로로 왕을 간하고 왕의 자문에 응한 대보가 있었으며, 왕명을 집행하는 고위관리로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이 있었다. 그후 (고주몽)고구려 때는 초기에 대보 직책이 폐지되고 오간, 마려는 좌보, 우보로 바뀌었다가 뒤에 국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협보는 직책 이름이 아니고 나라의 원로를 높여서 부른 명칭이다. 예를 들어 태공망을 사상부라 부른 경우 등이다. 참고로 (고주몽)고구려 때 협보는 대보 직책에 있었다. [註 "父"는 "남자를 높여 이르는 말" 또는 "신분이 낮은 늙은이를 부르는 말" 뜻으로 쓰일 때는 "보"로 읽는다. 그리고 온조백제 때는 대보가 보이지 않고 좌보, 우보가 행정과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였고, 신라는 초기에 대보가 행정과 군사를 함께 관장하다가 탈해왕 이후 이찬, 이벌찬 등이 행정과 군사를 맡아서 관장하였다.]
사서에는 오간(烏干)이 오이(烏伊)로 적혀 있고, 마려(馬黎)는 마리(馬籬), 마여(麻餘), 마리(摩離) 등으로도 적혀 있다. 오이(烏伊)의 오(烏)는 새라는 뜻이고, 간(干)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위에 나온 伊, 離, 籬, 餘 자는 부여 무리를 뜻하는 黎, 與 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글자이다. 그리고 마(馬)는 말을 뜻하고, 마(麻, 摩)는 마(馬)를 뒤에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
단군조선 때 고대 우리 민족은 하늘나라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상상의 동물인 용(龍:辰)을 해님의 아들이라 믿고, 해님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와 세운 나라의 임금을 진한 또는 진왕이라 불렀다. 또 달님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와서 세운 나라의 임금을 마한(馬汗:말 임금) 또는 번한(番汗, 飜汗:새 임금)이라 불렀다. 후에 새(鳥) 임금을 뜻하는 번한(飜汗)을 번한(番汗)으로 적었는데, 이는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
새와 말의 명칭을 사용한 직위는 고구려(북부여) 때도 있었는데, 고구려(북부여) 때는 단군을 좌우에서 보좌한 최고위 관리를 오간(烏干), 마려(馬黎)라 불렀다. 앞에서 고주몽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고구려(북부여)의 최고위 관리를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한국의 대부분 사학자는 신라의 초기 궁성이 경주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1년조를 보면 신라의 초기 궁성으로 사용된 금성은 경주 동남쪽에 있는 토함산보다 동쪽에 있었고 또 알천 옆에 있었다. 이 금성이라는 명칭은 월성과 같이 뒤에 경주로 지명 이동을 하였다.
신라의 초기 궁성이 경주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금성과 신금성, 월성과 신월성을 같은 곳으로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초기 궁성으로 사용된 금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신라본기에서 살펴본다.
「남해차차웅 11년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거느리고 와서 바닷가 민가를 약탈하므로 육부의 강병을 발동하여 막았다. 낙랑은 신라의 서울이 비었으리라 생각하고 금성을 공격하여 매우 위급하였는데,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무리가 겁을 내어 알천의 상류로 물러나 진을 치고 돌무더기 스물을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육부병 1천 명이 토함산 동쪽에서부터 추격하여 알천의 상류에 당도하여 돌무더기 스물을 보고 적의 수효가 많은 것을 알고 이내 중지하였다. 倭人遣兵船百餘掠海邊民戶發六部勁兵以禦樂浪謂內虛來攻금성甚急夜有流星墜於賊營衆懼以退屯於閼川之上造石堆二十而去六部兵一千人追之自吐含山東至閼川見石堆知賊衆乃止.」
위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거느리고 와서 바닷가 민가를 약탈하였다.
둘째, 강원도 방면 낙랑 무리는 신라의 육부병이 왜를 물리치기 위하여 동해 바닷가로 출동하느라 금성의 수비가 허술해졌다는 것을 알고 금성을 공격하였다. 낙랑 무리가 신라의 육부병이 동해 바닷가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 것을 보면, 당시 신라 바로 북쪽에 있는 안강, 흥해 등지의 소국들은 강원도 방면 낙랑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신라의 육부병은 왜를 물리치기 위하여 동해 바닷가로 출동했다가 낙랑 무리가 금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 낙랑 무리를 토함산 동쪽에서부터 알천상류까지 추격했다가 낙랑 무리가 만들어 놓은 돌 무더기 스물을 보고 나라 무리가 많은 것을 알고 추격을 중지하였다. 이를 보면 금성은 토함산보다 동쪽에 있었다. 또 강원도 방면 낙랑 무리가 되돌아간 방향은 북쪽이다. 따라서 알천 상류는 금성보다 북쪽에 있다. 만약 이때 신라의 궁성이 경주에 있었다면 낙랑 무리는 경주에서 바로 북쪽으로 되돌아갔지 경주 동남쪽에 있는 토함산 동쪽까지 왔다가 북쪽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함산보다 동쪽에 있는 금성 옆으로 알천이 흐르고 있었다. 토함산 동쪽에 있는 강은 대종천이므로, 알천은 대종천이다. 고대 우리 민족의 신앙에 "알"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므로, 알천은 천제의 아들이 있는 곳 옆을 흐르는 내(川) 즉 수도 옆을 흐르는 내라는 뜻이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금성은 토함산보다 동쪽에 있었고, 금성 옆으로 알천(대종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금성 북쪽에 알천(대종천) 상류가 있었다. 이 금성은 위치상으로 토함산과 감포 사이 어느 지점이다.
일부 사학자는 고대에 한강을 아리수라 불렀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낙랑이 신라를 수회 공격하였다는 문구가 나오며, 신라의 수도 금성 옆에 알천이 있었다는 문구를 들어, 신라를 공격한 낙랑은 평안도 방면 낙랑이고, 알천은 한강이며, 신라는 한강 유역에서 건국되어 경주로 남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평안도 방면 낙랑이 신라를 수회 공격하였다는 것은 신라와 평안도 지방 낙랑이 서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신라의 초기수도를 경주로 보아서는 평안도 방면 낙랑 무리가 신라의 수도를 공격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분은 낙랑이 평안도 방면에만 있었는 것으로 착각하였는데, 초기에 신라를 공격한 낙랑은 평안도 방면 낙랑이 아니고 강원도 방면 낙랑이다.
신라가 경주에 금성을 쌓고 궁성으로 사용한 시기는 미추니사금 때이다.
그후 김씨계인 미추니사금이 왕이 되어 김씨계의 근거지인 경주 계림에 신금성을 쌓고 토함산 동쪽 방면의 금성에서 계림의 신금성으로 궁성을 옮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추니사금이 토함산 동쪽의 금성에서 경주 계림의 신금성으로 궁성을 옮긴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미추니사금이 죽은 후 묻힌 장소가 대릉인 것으로 보아, 미추니사금은 첨해니사금 7년에 신라의 궁성을 장악한 후 토함산 동쪽 방면의 금성에서 경주 계림의 신금성으로 궁성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註 계림에 신금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신금성은 견고한 돌로 쌓은 석성이 아니고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추정된다.]
1. 서설
국내 대부분의 강단(講壇) 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보고 이를 믿지 않고 있다. 환단고기에 대하여 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학자는 극히 소수이고, 이들은 대부분 재야(在野) 사학자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는 강단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서일까? 아래에서 강단 사학자들이 위서라고 주장하는 견해의 요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위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의 요지 또한 살펴보기로 한다.
2.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견해 요지
가. 그 당시의 사회.문화 발전단계와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 2년조에 삼랑 박사 을보록에 명하여 처음으로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가람토 38자 중 28자는이조 세종대왕 때 창제한 훈민정음 28자와 모양이 같고 나머지 10자는 모양이 약간 변형되어 있다. 만약 단군조선 시대에 가림토라는 문자가 사용되었으면, 이를 사용한 비문이나 암벽에 조각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만주나 한반도 어디에도 이제까지 발굴된 유적,유물에 가림토 문자나 이와 비슷한 문자가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단군조선 시대에 한글과 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륵 단군 3년에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가림토를 발명한 다음해 가림토를 사용하여 사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또 8년에 지백특(티베트)을 토벌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단군조선의 영역이 서쪽으로 티베트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또 빈부의 격차에 따라 조세를 감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조세제도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4세 오사구 단군 원년에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몽고는 후대에 사용된 말이므로 믿기 어렵고, 5년에 둥근 구명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4세 오사구 단제 경인 7년에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조선소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5세 구을 단군 을축 4년에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서 책력을 만들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8세 우서한 단군 원년에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선진 조세제도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0세 노을 단군 5년에 궁문밖에 신원목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실정을 들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신문고 등 제도는 후대에 실시된 제도로 이때 벌써 이런 제도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11세 도해 단군 정사 28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을 물건들을 오마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박람회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3세 흘달 단군 갑오 16년에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군현제가 실시되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50년에 5성(星)이 루수(婁宿)에 모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이 정도의 천문지식이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14세 고불단군 을해 56년에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8천만인이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9세 구모소 단군 54년에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지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별들이 운동하는 것을 적은 천문학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27대 두밀 단군 신묘 8년에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쏟아져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니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구휼제도인 의창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44세 구물 단군 17년에 감찰관을 주와 군에 파견하여 아전과 백성들의 죄상 등을 자세히 밝히고 효도하는 사람과 청렴한 사람을 천거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벌써 이런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믿기 어렵다.
나. 단군세기에 기록된 역대 단군의 평균 재위년수가 44년 6개월이 되는데, 이는 현저하게 객관성 타당성이 없다.
다. 중국의 문헌과 맞지 않는 기사가 있다.
-4세 오사구 단군 19년에 하나라 임금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 버리니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령하여 남, 진, 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토록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후한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이 기사는 하나라 3세 왕 태강 때의 기사이지 5세 왕 후상 때의 기사가 아니다.
-23세 아홀 단군 2년에 남국후 금달이 청구후, 구려후와 주개에서 만나 몽고리의 병력과 합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쳐부수고 오지까지 깊이 쳐들어가 회, 대 땅을 평정하여 박고씨를 엄(淹)에, 영고씨를 서(徐)에, 방고씨를 회(淮)에 분봉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후한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이는 은나라 22세 조갑 23년의 기사가 아니라 은나라 25세 무을(B.C 1978-1955) 재위 때의 일이다. 약 40년 차이가 난다.
라. 객관적 타당성이 없는 기사가 있다.
3세 가륵 단군 8년조에 강거(중앙아시아)가 반하므로 단제가 이를 지백특(티베트)에서 정벌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티베트 민중들이 믿고 있는 개국연대는 B.C 477년이므로, 단군조선 시대에 티베트라는 지명이나 국명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객관적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없으므로 위서이고 믿을 수 없다.
마 고고학적 유물과 맞지 않는다.
고고학자들 상당수는 만주의 유물을 보고 만주에 나라가 세워진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는 단군조선이나 그 전에 존재했다는 배달국이나 환국의 역사를 적은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3. 환단고기는 다소 과장된 내용이 있지만 실사(實史)라고 보는 견해 요지
가.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
강단 사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주장하자 환단고기에 적혀 있는 자연현상 주로 천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검증하여 위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주로 천체학 등을 연구한 분들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적혀 있는 천체현상이 실제와 일치하는지 검증해 본 결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보고 환단고기를 실사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그 당시에 그 정도의 천문지식이 있었다고 믿기 어렵고 천문학의 지식이 발달한 후대에 누가 가필해 넣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나. 중국의 정사와 비교연구로 검증
중국의 정사에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도저히 정사(正史)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고기(古記)에 의하여 쉽게 해명되는 것을 보고 다소 과장이나 오류가 있을지라도 고기를 실사(實史)로 보고 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들이다. 즉 단군조선의 역년에 있어 다른 사서에 1038년, 1048년, 1908년 등으로 적혀 있는 이유,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중국의 사서에서 고구려가 나타나는 이유, 중국의 사서에 백제군이 중국동해안지방과 요서지방에 나타나는 이유, 백제와 왜(倭) 관계 등은 고기(古記)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고기의 내용에 중국의 사서와 일치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고기를 지을 때 중국의 사서를 보고 인용하였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잇다.
4. 환단고기 저술방법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말하는 것은 적당한 용어가 아니다. 환단고기는 책 서문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계연수님이 저본사료를 통합하여 지은 것이지 계연수님이 위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계연수님이 환단고기를 지을 때 인용한 저본사료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별개 문제이다.
먼저 계연수님이 환단고기를 지을 때 인용한 저본사료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살펴본다.
삼성기에는 환국의 영역은 천해의 동쪽, 배달국의 영역은 만주 전지역과 중국의 북부와 동부지방, 단군조선의 영역은 만주 전지역, 한반도, 일본, 중국의 북부, 동부지방 등 아주 광범위한 지역으로 적혀 있다. 그렇지만 고대에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의 통일국가가 존재하였다고 믿기 어렵다. 사기 흉노전에 나오는 만주 기마족의 상황을 보면, "만주에는 가끔 100여 개의 융(戎)이 합치는 일은 있어도 하나로 단결되지는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성기나 단군세기에는 왜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의 통일국가가 존재하였다고 적혀 있을까? 이는 고대 우리민족의 신앙, 천하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기에 적혀 있는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영역은 행정력, 군사력이 실제 미치는 현대의 나라 개념과 전혀 다르다. 고기에 나오는 단군조선의 영역은 자신들의 조상이 하늘나라에서 하늘나라 임금님의 아들 환웅과 함께 지상세계로 내려 왔다는 신앙을 믿은 무리들이 거주한 전지역을 지칭한 것이다. 고대에는 이 영역 내에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가 있었고, 각 나라마다 영역과 지도자가 있었다. 이 무리들은 해님과 달님을 하늘나라 임금으로 믿었고, 이 무리들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무리의 지도자는 천제의 아들을 칭하며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주도하였다. 이 무리들은 신앙이 서로 일치하였고, 중국을 침략할 때는 약탈이라는 목적이 동일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였다.
발해인 대야발이 지은 단기고사에는 이 무리들이 거주한 전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적혀 있다. 이는 발해인들이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 순으로 정통성이 승계되었다고 주장하고, 천하의 중심은 천제의 아들이 있는 곳이고, 단군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세계관으로 사서를 지었기 때문에 실제 행정력, 군사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도 전부 단군의 영역으로 적혀 있다.
다음으로 삼성기 저술방법을 살펴본다.
삼성기에는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가 적혀 있는데, 삼성기에 나오는 환국 12국 중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는 7세기 초에 지은 진서(晋書)에 그 이름이 나오고, 삼성기에 적혀 있는 환국의 영역 남북 5만리는 진서에 적혀 있는 일군국에서 숙신까지 거리 5만리와 일치한다. 환국 12국의 이름이 7세기 초에 지은 진서의 동이국 명칭과 거의 같다는 것은 삼성기를 지을 때 전래자료 외에 중국의 사서 내용을 참조하여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기에는 환국 때 6 환인이, 배달국 때 18 천왕이 있었다고 적혀 있으나, 배달국의 역사에 시조 환웅, 갈고 환웅, 자오지 환웅(치우 천왕)에 관한 사실만 나오고, 다른 천황들에 관한 사실은 적혀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삼성기를 지을 때는 전래자료에 시조환웅, 갈고환웅, 자오지환웅(치우 천왕)에 관한 내용만 있었고, 나머지는 천왕들은 단지 이름만 적혀 있었거나 아니면 가필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단군세기 저술방법을 살펴본다.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홍행촌 노인이 고려 말인 A.D 1363년에 강화도 해운당에서 지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책은 발해 때인 A.D 719년에 대야발이 지은 단기고사를 저본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따라서 단기고사와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내용이 거의 같아야 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단기고사에 나오는 내용이 많이 삭제되어 있고, 삭제된 내용은 주로 그 시대의 문화 발달 정도에 비하여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 즉 홀달 단군 50년에 오성이 모여들었다는 문구, 각종 전기기기 제품류 등을 만들었다는 내용, 정치원론을 저술하였다는 문구, 총을 만들었다는 문구, 성리학.심리학을 지었다는 문구 등이다. 이는 단군세기를 지으면서 저본사료인 단기고사에서 그 시대의 문화 발달 정도에 비하여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을 삭제하고 지었다는 것을 의미라는 것으로, 역으로 해석하면 단기고사에 적혀 있는 사실 중 그 시대의 문화발달 정도에 비하여 믿기 어려운 내용은 후에 가필해 넣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단군세기 저자는 단기고사에서 가필 가능성이 있는 내용을 빼고 단군세기를 지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역사를 지은 책으로는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외에 규원사화가 있다. 그런데 단군세기와 규원사화를 대비해 보면 내용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내용이 같은 부분은 47명의 단군 이름과 단군에 관한 사실 중 1세 단군에 관한 내용, 2세 단군에 관한 내용, 4세 오사구 단군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3세 가륵단군 때 하나라 임금이 덕을 잃자 식달에게 명하여 남국,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가서 이들 치게 하였다는 내용(단군세기에는 오사구 단군 때 일로 적혀 있다), 8세 우서한 단군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규원사화에는 90분의 1, 단군세기에는 20분의 1), 9세 아슬 단군이 "임금은 어진덕이 있었다. 백성들이 법을 어길지라도 '똥구덩이가 비록 더럽더라도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다'하며 내 버려 두니 백성들이 감화되었다"는 내용, 10세 노을 단군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3세 홀달 단군이 하나라를 치고 빈, 기의 땅을 점령했다는 내용, 15세 대음 단군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과 은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도와줄 것을 청했다는 내용, 23세 아홀 단군이 동생 고불가에게 낙랑골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으로 하여금 은나라를 정벌하여 고을을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 28세 해모 단군이 병을 얻었는데 하늘에 빌게했더니 병이 나았다는 내용, 29세 마휴 단군 때 지진이 있었다는 내용, 30세 내휴 단군이 청구를 둘러 보고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한(汗)들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고불가 단군 때 단군조선이 망했다는 내용 등이다.
내용이 다른 부분은 존속기간 등이다. 단군세기에는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이 B.C 2333년부터 238년까지 2,096년간으로 적혀 있는 반면에 규원사화에는 B.C 2333년부터 B.C 1139년까지 1,195년간으로 적혀 있다. 즉 단군의 이름과 숫자는 같지만 존재시기는 현저히 차이가 난다. 단군세기에는 단군조선의 멸망연도가 B.C 238년으로 적혀 있는 것은 단군조선 다음에 존재한 북부여(일명 고구려)가 B.C 239년에 건국되어 다음해 단군조선을 멸망시켰다는 북부여기 내용에 맞춘 것이고, 규원사화에 단군조선의 멸망연도가 B.C 1,139년으로 적혀 있는 것은 중국의 사서에 기자가 동래하여(B.C 1122년)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내용에 맞추어 단군조선의 멸망시기를 기자동래 이전으로 맞춘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단군세기와 규화사화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이 틀리는데도 불구하고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에 내용이 같은 사실이 적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단군세기나 규원사화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저본사료에 47명의 단군 이름과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위에 나온 내용이 같은 부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중국과 관련된 사실이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에 모두 적혀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단군 본기에 적혀 있는 것은 중국에 관련된 사실을 연도에 맞추어 단군본기에 삽입해 넣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군조선을 보는 시각은 기자 동래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은 전조선, 그 이후는 후조선으로 보는 시각과 단군조선을 3기로 나누어 1기만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 1. 2만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 1.2.3기 모두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 진다. 1기는 단군조선이 개국되고부터 색불루가 무력으로 단군 자리를 빼앗은 B.C 1286년까지 1,048년간이고, 2기는 색불루가 무력으로 단군이 된 B.C 1285년부터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하였을 때인 B.C 426년까지 860년간이며, 3기는 구물 장군이 압록 18성의 도움을 받아 우화충을 물리치고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어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꾼 B.C 425년부터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산으로 들어 간 B.C 238년까지 188년간이다.
1기만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는 색불루가 무력으로 단군조선을 빼앗았을 때 단군조선이 끝났다고 본 견해이고, 1.2기를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는 색불루가 무력으로 단군 자리를 빼앗았다고 해도 단군만 바뀌었지 단군조선은 계속되었다고 본 견해이며, 1.2.3기를 단군조선으로 보는 견해는 우화충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압록 18성이 일어나 우화충을 쫒아내고 구물을 단군으로 추대하여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어도 단군조선은 그대로 계속되었다고 본 견해이다.
그리고 기자 동래를 기준으로 하여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누는 견해는 은나라가 멸망하고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의 후(侯)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이는 당시 만주 사정으로 보아 믿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기조에 있는 규원사화는 믿기 어렵다. 또 단군세기도 단군조선은 1.2.3기로 나눌 정도로 시대별로 성격이 현저히 다르고, 또 중간 중간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지 않는 등 단군이 연속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만주 전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이고 왕검 이후 단군의 공백기가 없이 계속적으로 단군조선이 존속한 것처럼 적혀 있어 이러한 기조에 있는 단군세기도 모두 믿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하여 단군세기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발해인 대야발이 만주 기마족 무리의 역사를 단군조선사로 꾸민 단기고사를 저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사서에는 만주남부, 요동반도 등지만 조선으로 적혀 있지만, 단군세기에는 중국의 북.동 만주 전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단군세기는 시대에 따른 만주 기마족의 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즉 1기 단군조선은 추대에 의하여 단군이 되었고, 단군의 힘이 강하지 않아 태자가 세습하기보다 양가나 우가가 단군을 승계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2기 단군조선은 무력에 의하여 단제가 정해졌고 아들에게 상속되었다는 것, 3기 단군조선은 압록 18성의 힘이 강하였고, 단제는 전쟁의 결정권이 없는 등 단제의 힘이 아주 약하였다는 것 등은 당시 만주 기마족의 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북부여기 저술방법을 살펴본다.
북부여기에는 각 단군에 관한 본기 내용이 상당히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북부여기를 저술할 때 저본사료가 상당히 상세하게 적혀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북부여기는 단군조선의 멸망에 고구려(북부여)가 어떤 관련이 있고, 후에 고구려(북부여)가 분열되어 고구려(북부여)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 북부여, 동부여 등으로 갈라지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북부여기에 의하지 않고는 고구려가 왜 B.C 37년 이전에 중국의 사서에서 나오는지?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의 말에 나오는 고구려 역년 900년 중에서 (고주몽)고구려 역년을 제외한 나머지 6대 200여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저술방법을 살펴본다.
태백일사에는 단군본기와 북부여본기를 제외한 환국, 배달국, 고구려국본기, 대진군본기 외에 경전 등 여러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중 삼국사기에서 검열 등으로 삭제된 부분을 보충하는데 잇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고구려국 본기에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처럼 각 왕의 본기가 상세히 적혀 있지 않고 특정 왕에 관한 사실만 집중적으로 적혀 있다. 이 고구려국본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삭제된 광개토대왕의 대마도, 일본열도 정복, 임나연정설치, 백제의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 진출 등의 사실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구려국본기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백제, 고구려 전성시기에 강병 100만으로 유.연.제.노 등지를 침략하였다는 문구 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외 나머지는 지면상 생략한다.
5. 결론
환단고기는 계연수님이 전에부터 전해오는 저본사료를 함께 묶어 편찬한 것이지 계연수님이 환단고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환단고기 자체는 위서가 아니다. 다만 환단고기에 인용된 저본사료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별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