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朝鮮의 正體
1. 朝鮮의 의미
역사사이트를 다녀보면 간혹 朝鮮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풀이하여 올린 글이 더러 보인다.
어떤이는 朝鮮의 어원은 朝와 鮮으로 나누어 봐야 하는데, 朝의 음은 고대에 "조"가 아니라 "됴"에 더 가까웠고, 朝는 倝와 舟가 합쳐진 글자인데 舟의 小篆이 月의 楷体와 비슷하여 朝의 형태를 띄었지만 음은 舟를 따라야 하고, 鮮의 어원은 白(센)인데, 白(센)을 한자로 음차하여 鮮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이분 주장은 朝鮮은 鷄白이라는 뜻이며 대개 도르센으로 읽을수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분 글은 이글 저글 읽고는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는체 하느라 이글 저글을 조금씩 가져와 짜깁기하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뚱한 글이 되어 버렸다.
漢字 朝가 大篆體 "조" 字와 小篆體 "조" 字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大篆體 "조" 字와 小篆體 "조" 字에서 朝鮮의 朝 의미를 알 수 있는가? 이분은 朝鮮이라는 명칭을 고대에 먼저 사용한 곳이 우리 민족인지? 아니면 中國의 史家인지? 조차 모르고 있다.
朝鮮이라는 명칭을 먼저 사용한 곳은 우리 민족이 아니고 中國의 史家들이다. 朝鮮이 中國王朝 사서에 보이는 시기는 春秋時代부터이다. 이 朝鮮이라는 명칭은 그후 우리 민족이 史書(古記)를 만들 때 中國의 史書를 인용하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史書에도 朝鮮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것을 착각하여 마치 檀君이 나라를 세우고부터 朝鮮이라 불렀는 듯이 알고 있다.
古記를 보면 우리민족이 사용한 나라 명칭은 朝鮮이 아니다. 고대 우리민족은 자신들을 하늘나라에서 하늘나라 임금님의 아들 桓雄과 함께 무리 3천이 지상으로 내려온 무리라고 주장하였고, 뒤에 漢字가 사용되면서 이 말을 漢字로 적음에 있어 하늘나라를 不(불), 高, 火(華), 白, 桓, 玉 등 漢字를 사용하고, 무리는 與, 黎, 曹 등 漢字를 사용하여, 不與(불여), 不黎, 高黎, 玉曹 등으로 적다가 뒤에 漢字 발음이 변하여 夫餘, 扶余, 高麗, 高離, 不耐, 華麗, 沃沮 등으로 적었다.
고대 우리 민족은 "해뜨는 곳에 있는 나라"라는 뜻도 朝鮮이라 적지 않고 漢字로 白國(시라기)으로 적고 뒤에 한자가 변하여 白木(시라기)으로 적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골(忽)을 紇升骨(紇은 고대말 헤<태양>를 음차한 것이고, 升은 오른다는 뜻이며, 骨은 고을이라는 뜻인 忽<골>을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과 이라 적었지 朝鮮이라 적지 않았다. 즉 朝鮮이라는 명칭은 中國의 史家들이 먼저 사용한 명칭이고, 이것에 後世에 우리 민족에게 전해져 史書에 적히게 된 것이지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자신들이 세운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中國王朝의 史家들이 말하는 朝鮮은 中國王朝의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春秋時代에는 渤海北岸에 있었고, 燕나라 장군 秦開에게 서쪽 땅을 빼앗긴 후에는 난하 동쪽 遼西地方에 있었으며, 漢나라가 衛滿朝鮮과 遼河 동쪽 高九黎(북부여) 지역을 점령한 후에는 西北韓을 朝鮮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漢나라가 점령한 遼西, 遼東 지방을 전에 朝鮮지역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春秋時代에 中國의 史家들이 渤海北岸에 있는 朝鮮을 과연 "힘쎈 나라"라는 뜻으로 朝鮮이라 불렀을까?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설사 朝鮮의 힘이 당시 中國王朝의 힘보다 더 세었다 할지라도 붓 작란을 일삼는 中國王朝 史家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朝鮮을 中國王朝보다 더 센 나라라고 적지는 않았을 것이 명백하다. 더구나 中國王朝의 史家들은 朝鮮을 周나라의 侯國이라고 제멋대로 주장한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2. 發朝鮮의 正體
中國王朝의 史書에서 이른 시기에 나오는 朝鮮에는 發朝鮮이 있다.
齊나라 재상 管仲(B.C ~645년)의 저술인 管子 輕重 甲篇과 揆度篇에는 春秋時代 齊나라와 朝鮮 간의 교역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管子는 管仲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春秋時代부터 戰國時代를 거쳐, 前漢 때 완성되기까지 약 700년간에 걸쳐 가필이 이루어져 완성된 책이다.
管子 輕重 甲篇에는 齊 桓公이 管仲에게 四夷가 불복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불복하는 四夷에 대하여 어떤 방책을 쓰면 入朝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 내용이 나오고, 이에 대하여 管仲은 그 나라 특산물을 높은 가격으로 사주면 교역하기 위하여 저절로 찾아오게 된다고 대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 중에 發朝鮮의 특산물로 표범 가죽과 털옷을 들고 있다.
「桓公曰 四夷不服恐 其逆政游于天下而傷寡人 寡人之行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 發朝鮮不朝 請文皮타 服而以爲幣乎...而闢千金者 珠也 然后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后八千里之發朝鮮 可得而朝也. 환공이 말하기를 四夷가 입조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들이 나의 정치를 거역함이 천하에 널리 퍼질까 과인이 근심이오. 이런 행위에 과인에게 방책이 있겠소? 관자가 대답하기를 吳, 越이 입조하지 않는 것은 진주와 상아를 예물로 삼았기 때문이고, 發朝鮮이 입조하지 않는 것은 표범 가죽과 털옷을 예물로 요청했기 때문입니다..중략..그러므로 창고를 열어 진주값을 千金과 같이 쳐준 연후에는 팔천리 吳越의 入朝를 받을 수 있고, 한 장의 표범 가죽에 황금을 가득 담을만큼 값을 후하게 쳐준 연후에는 팔천리 發朝鮮의 入朝를 받을 수 있습니다.」
[注 "元材案 : 發朝鮮 又見《輕重甲篇》發國名《逸周書 王會解》燕人發 一名北發《史記 五帝本紀》: 北發山戎息愼《漢書 武帝紀》: 海外肅慎北發渠搜氐羌徠服 晉灼曰:《王恢傳》北發月氏可得而臣 似國名也 此以發與朝鮮連言 則北發當在朝鮮附近 何如璋釋《輕重甲篇》所謂 發卽北發國近朝鮮是也 文皮 虎豹之皮《輕重甲篇》云: 發朝鮮不朝 請文皮타服而以爲幣乎? 又曰: 一豹之皮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又《爾雅》: 東北之美者 有斥山之文皮焉 斥山在今山東榮城縣南 蓋登州爲發朝鮮之通商口耳 江陽又見《山至數篇》禺氏又見本篇下文 及《國蓄》《地數》《輕重乙》等篇 解均已見《國蓄篇》又案此段文字又見《山至數篇》惟彼處只三筴 此有七筴 是其不同耳."]
管子 揆度에는 齊 桓公이 管仲에게 海內에서 禮物로 받을 수 있는 7가지가 무엇인지 묻자 管仲이 아래와 같이 대답한 내용이 나온다.
「桓公問管子曰 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陰山之礝민一筴也 燕之紫山白金一筴也 發朝鮮之文皮一筴也 汝漢水之右衢黃金一筴也 江陽之珠一筴也 秦明山之曾靑一筴也 禺氏邊山之玉一筴也 此謂以寡爲多 以狹爲廣 天下之數 盡於輕重矣". 환공이 관자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로는 해내에서 옥페(예물)로 받을 수 있는것이 7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들을 수 있겠는가?" 관자가 대답하기를 "음산에서 나는 연과 민이 그 하나이고, 연나라 자산에서 나는 백금이 그 하나이며, 발조선의 표범가죽인 문피가 그 하나이고, 여수와 한수의 우측 경계에서 나는 황금이 그 하나이며, 장강 북쪽에서 나는 진주 구슬이 그 하나이고, 진나라 명산에서 나는 푸른색 염료가 그 하나 이며, 우씨 변산에서 나는 옥이 그 하나입니다." 이는 귀한 것(화폐)을 이용하여 부유함을 통제하고, 좁은 지역을 이용하여 넓은 지역을 통제하는 방법입니다. 천하의 재정정책은 모두 물가 조절 방법에 달려 있습니다.”] 管子 揆度
위에 나온 문구를 정리하면,
가. 이 문답이 있었는 시기는 齊 桓公(B.C 685-643년) 때이다.
나. 桓公 당시 發朝鮮은 齊나라에 入朝하지 않고 있었다.
다. 위에서 發朝鮮으로 불린 지역은 渤海 북쪽 朝鮮 지역 전체이다. 戰國時代에 燕나라가 朝鮮으로부터 빼앗은 上谷에서 난하 사이 朝鮮 지역을 發 또는 北發로 불렀는데, 이는 앞에서 나온 發朝鮮 지역의 일부일 뿐이다.
史記 貨殖列傳을 보면 燕나라가 朝鮮으로부터 上谷에서 난하 사이 發朝鮮 지역 일부를 빼앗은 후 燕나라 특산물에 文皮가 없다. 따라서 燕나라가 朝鮮으로부터 빼앗은 상곡에서 난하 사이 發朝鮮 지역 일부에는 文皮가 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管子에 發朝鮮에서 文皮가 난다고 한 곳은 난하보다는 동쪽 發朝鮮 지역이다.
라. 四夷를 거론하면서 齊나라는 發朝鮮 및 吳,越과의 거리를 8천리로 보고 있다. 8천리는 멀다, 커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관념적 용어이지 실제 거리가 아니다.
마. 위 註釋에 나오는 문구에는 發朝鮮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管子 輕重甲篇, 逸周書 王會解, 史記 五帝本紀, 漢書 武帝紀 등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하였으나, 發朝鮮의 의미가 통일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즉 發을 國名이라고 하다가 燕나라 사람을 發 또는 北發이라 하는 등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여러 문구를 종합하면 發朝鮮은 당시 朝鮮 지역을 총칭하는 명칭이고, 發朝鮮 지역 중 燕나라가 朝鮮으로부터 빼앗은 上谷에서 난하 사이 發朝鮮 지역 일부를 發 또는 北發로 불렀다.
바. 위에 적혀 있는 [東北之美者 有斥山之文皮焉 斥山在今山東榮城縣南 蓋登州爲發朝鮮之通商口耳] 문구를 보면 齊나라와 發朝鮮과의 통상창구는 登州이다.
다음으로 史記 五帝本紀를 살펴본다.
「唯禹之功 為大 披九山 通九澤 決九河 定九州 各以其職來貢 不失厥宜 方五千里 至於荒服 南撫交址 北發 西戎 析枝 渠廋 氐 羌 北山戎 發息慎 東 長 鳥夷 四海之內 鹹戴帝舜之功」「注 : 索隱此言帝舜之德皆撫及四方夷人 故先以 "撫"字總之 北發當云北戶南方有地名北戶 又案漢書 北發是北方國名 今以北發為南方之國 誤也.」
史記 五帝本紀에는 發息慎이 나오는데 이는 發朝鮮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史記 列傳 蘇秦傳을 살펴본다.
史記 列傳 蘇秦傳을 보면 蘇秦은 燕의 文侯(B.C 361 ∼ 333년)에게 당시 燕나라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燕의 동쪽에는 朝鮮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林胡, 樓煩이 있다.”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戰國策 燕策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으며 국토는 사방 2천리이다.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陀易水地 方二千餘里」 戰國策 燕策
「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史記 列傳 蘇秦傳
蘇秦이 합종을 성립시키고 6국의 재상을 겸한 시기는 B.C 333년이므로, 蘇秦이 이 말을 할 때는 秦開가 朝鮮을 침략하기 전이다. 이때는 上谷, 漁陽, 右北平이 朝鮮 땅이므로, 秦開의 朝鮮 침략 전 燕의 동변은 北京 동쪽 방면이 된다.
이때 燕나라와 朝鮮은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燕나라와 朝鮮 사이에 다른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위 문구에 나오는 朝鮮遼東은 분리하여 읽을 것이 아니라 붙여 읽어야 하는데, 朝鮮遼東은 遼東으로 부르는 곳이 朝鮮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때는 發朝鮮이 나타나지 않고 朝鮮만 나오는데, 朝鮮을 어떤 때는 發朝鮮으로 부르고 어떤 때는 朝鮮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山海經 문구를 살펴본다. 前漢 初에 완성된 山海經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어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海內北經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천독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海內經
위 山海經 문구를 보면 渤海 북쪽이 朝鮮 지역이고, 그 서쪽이 燕나라이다. 山海經 문구에 의하여도 燕나라와 朝鮮은 서로 연접해 있고 發朝鮮이라는 별개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朝鮮을 수식어 發을 붙여 發朝鮮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史記 貨殖列傳을 살펴본다.
「燕도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있는 큰 고을이다. 연나라는 남쪽은 趙.齊에 통하고 東北쪽은 胡와 경계를 접하며, 上谷으로부터 遼東에 이른다. 변두리 땅은 아주 먼곳에 있어 주민이 적고 자주 침범을 당했다. 민속은 趙, 代와 대단히 닯았으나 이곳 백성은 아직도 독수리처럼 정한하고 사려가 얕다. 물고기 소금 대추 밤이 많이 난다 북쪽은 烏桓 夫餘와 이웃하고 동쪽은 穢貊朝鮮眞番과의 교역에서 이득을 독점한다.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 南通齊趙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踔遠人民希 數被寇 大與趙 代俗相類 而民雕捍 少慮 有魚鹽棗栗之饒 北鄰烏桓夫余 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이 시기는 燕나라의 영역이 勃海와 碣石山 사이라고 적혀 있어 秦開의 朝鮮 침략 후 燕나라의 동변이 東進한 후 상황이다. 이때 燕과 朝鮮이 접하고 있는 시기인데, 이때는 發朝鮮으로 적혀 있지 않고 朝鮮으로 적혀 있다. 이때는 朝鮮에 수식어 發을 붙이지 않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齊나라는 發朝鮮의 특산물인 표범 가죽과 털 옷을 비싸게 사주고 發朝鮮을 入朝시키려 하였는데, 이 發朝鮮의 의미는 朝鮮에 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른 것이다. 따라서 春秋時代에 燕나라와 朝鮮이 경계를 접하고 있었으므로, 燕나라와 朝鮮 사이에는 發이라는 독립된 별개의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다. 즉 朝鮮을 어떤 곳에서는 發朝鮮이라 불렀다.
發朝鮮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중국의 史家들이 취하는 특이한 史書 기재 기법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史家들은 어느 지역이나 나라를 여러 가지 기준으로 적었는데, 渤海 북쪽 지역 또는 그곳에 사는 무리을 어떤 때는 朝鮮 또는 發朝鮮으로 적고, 어떤 때는 東胡로 적고, 어떤 때는 匈奴로 적고, 어떤 때는 개별 국가 이름으로 적었다. 朝鮮은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인데, 朝鮮과 함께 사용되는 용어는 朝鮮을 특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中國王朝의 史家들이 朝鮮에 發을 붙인 것은 朝鮮 무리들은 밝은 빛을 내는 해와 달을 天神으로 숭배한 고대 信仰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